2017년 4월 30일 일요일

5.18 광주 학살 - 계엄군의 의대 집중 사격(연합 뉴스 인용).

전남대병원 의료진 5·18 증언집(광주=연합뉴스)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병원에서 근무한 의료진의 증언집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증언집에는 5·18 당시 계엄군이 전남대병원을 향해 집중 사격한 사실 등이 담겨있다. [전남대병원 제공=연합뉴스] 20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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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병원 의료진 증언집서 계엄군 사격 사실 드러나

(광주=연합뉴스) 장덕종 기자 =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학교병원도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이 이뤄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5·18 당시 전남대병원 의료진의 증언집 '5·18 10일간의 야전병원'에 실려있다.

당시 전남대병원 의료진은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병원을 향해 사격했고 이후 총을 들고 병원에 들어와 위협했다고 증언했다.

이는 계엄군이 당시 광주 재진입 작전 수행 전 이미 전남대병원을 진압 목표로 정했다는 정황을 보여준다고 의료진은 증언하고 있다.

적의 의료시설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국제관례마저 무시한 비인도주의적 진압사례였음을 입증한다고 의료진은 설명했다.

또 5·18 당시 전남대병원에 대한 집중 사격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퇴각한 21일 단 한 차례였다고 알려졌으나 27일 한 차례 더 발생했다는 사실도 추가로 밝혀졌다.

당시 마취과 레지던트였던 유경연 전남대의대 명예교수는 증언집에서 "계엄군은 병원 담 쪽을 에워싸더니 일제히 총격을 가했으며, 이후 안으로 들어와 일일이 병실을 검문했다. 날이 밝아 확인한 결과 당시 임시숙소로 사용한 11층 병실의 유리창 대부분은 총격에 깨졌다"고 밝혔다.

5·18 당시 전남대병원 진료 모습(광주=연합뉴스)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병원 의료진의 활동 모습. [전남대병원 제공=연합뉴스] 20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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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명예교수는 "당시 병원 옥상에는 시민군이 설치한 기관총이 있었으며 계엄군이 그곳을 향해 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11층을 향한 것으로 느꼈다"고 덧붙였다.

당시 임상병리과 레지던트였던 서순팔 현 진단검사의학과 교수는 "군인들이 복도를 거닐면서 확성기를 통해 '너희들은 포위됐다. 투항하라'고 소리쳤다"며 "당시 검사실에 있었던 우리는 손을 들고 나갔고, 군인들은 검사실 안을 샅샅이 수색했다"고 설명했다.

또 외과 레지던트였던 김현종 전남대병원 명예교수는 "자고 있던 새벽 4시경 병원쪽으로 수 십발의 총격이 있었고, 숙소로도 총알이 들어와 모두 겁에 질린 초긴장 상태였다"고 회고했다.

당시 흉부외과 레지던트였던 오봉석 흉부외과 교수도 "숙소에 함께 있던 동료 의사가 밖을 보려다 총에 맞을 뻔한 위험한 상황도 있었으며, 무서워 화장실로 들어가 숨은 직원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당시 외과 조교수였던 김신곤 명예교수는 "계엄군이 진압을 위해 새벽에 들이닥칠 때 11층 병실에서 자고 있던 우리에게도 총구를 들이댄 기억이 희미하다"고 회고했다.

증언집에는 계엄군이 광주를 퇴각하면서 전남대병원에 첫 번째 집중사격을 가한 21일 상황도 비교적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당시 응급실 인턴이었던 유재광 목포한국병원장은 21일 저녁 총성을 듣고 응급실 당직실에서 밖으로 나와 목격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5·18 당시 전남대병원 진료 모습(광주=연합뉴스)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병원 의료진의 활동 모습. [전남대병원 제공=연합뉴스] 20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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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원장은 "M60 군용 트럭의 선탑자는 권총을 들고 있었는데, 2층 이상의 건물이 나타나면 무조건 총을 쏘았다. 선탑자가 총을 쏘면 뒤쪽 화물칸의 양옆에 군장을 세우고 엎드려 있던 계엄군이 60도 각도로 M-16을 연속 발사했다"고 설명했다.

또 당시 병원장이었던 고 조영국 전남대병원 명예교수는 "그날 오후 6시경 군인들이 학동 쪽으로 퇴각하면서 병원에 총을 쏘고 갔다. 그 때 직원 네 명과 함께 있었던 내방에도 한발이 날아와 박혔다"고 밝혔다.

당시 정형외과 교수였던 노성만 전남대의대 명예교수는 "계엄군은 당시 정형외과가 있는 건물을 향해 총을 수평으로 들고 쐈다. 불이 켜져 있는 2층을 보고 사격했으며, 총소리에 누구나 할 것 없이 바닥에 엎드렸다"고 기억했다.

이후 당시의 총탄 흔적이 남아있는 노성만 교수의 캐비닛과 가운은 현재 전남대 5·18연구소와 전남대 의학박물관에 각각 전시돼 있다.

전남대병원은 2일 5·18 당시 전남대병원 의료진의 증언을 모은 '5·18 10일간의 야전병원'을 발행한다.

이 책에는 당시 전남대병원 의사, 간호사 등 28명의 증언이 약 220페이지에 걸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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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학살 증언 - 병원 집중 사격, 군화발로 짓밟았다 (중앙일보 인용).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옛 전남도청을 장악한 계엄군. [사진 5·18 기념재단]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을 최종 진압할 당시 인근 전남대병원까지 점령했다는 진술이 37년 만에 처음 확인됐다.

전남대병원이 1일 공개한 80년 당시 의료진들의 증언집 『5·18 10일간의 야전병원』에 따르면 "5·18 마지막 날인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을 진압할 당시 환자들이 치료를 받던 전대병원까지 점령했다"는 증언이 처음으로 나왔다.

5·18 나흘째인 80년 5월 21일 "퇴각하던 계엄군이 전대병원 향해 총을 쐈다"는 진술은 있었으나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을 최종 진압한 5월 27일에 병원에까지 총기를 난사하고 강압적인 수색을 했다는 증언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80년 5·18 당시 전남대병원 의료진들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사진 5·18 기념재단]

80년 당시 신군부가 '분쟁 지역의 의료시설과 의료진에 대한 보호 의무'를 담은 제네바협약 등 국제관례까지 무시하며 비인도주의적인 과잉진압을 한 것이 또 한 번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이는 최근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무차별 살상이나 시민을 향한 발포명령이 없었다"고 말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록이다.

1980년 5·18 당시 전남대병원에서 환자를 돌봤던 의료진들의 증언을 담은 증언집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아울러 이번에 확인된 증언은 계엄군이 5·18 마지막 날에 옛 전남도청과 전대병원에 대한 진압 작전을 동시에 펼친 것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날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워 광주시내 진입한 시간대인 오전 3시부터 전대병원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다. 이후 계엄군은 이날 오전 5시10분 옛 전남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진압작전을 종료했다.
5.18 당시 부상을 입고 전남대병원에 입원한 환자. [사진 5.18기념재단]

총기 난사 당시를 증언한 의료진들은 참혹했던 80년 당시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5·18 당시 마취과 레지던트였던 유경연 전남대의과대 명예교수는 "27일 계엄군은 병원 담 쪽을 에워싸더니 일제히 총격을 가했으며, 이후 안으로 들어와 일일이 병실을 검문했다"고 증언했다.

유 교수는 또 "날이 밝아 확인한 결과 당시 임시숙소로 사용했던 11층 병실의 유리창 대부분은 총격에 깨졌다"고 말했다.

서순팔 전남대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교수는 "5월 27일 새벽 3시쯤 광주에 들어온 20사단이 전남대병원도 접수했다"고 진술했다. 80년 당시 전남대병원 임상병리과 레지던트였던 서 교수는 "(병원)복도를 거닐던 군인들이 확성기를 통해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투항하라'고 소리쳤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수만(70) 전 5·18 민주유공자유족회장은 "계엄군이 환자들이 치료를 받던 병원을 향해 마구 총질을 하고 강압적인 수색을 벌인 것은 전두환 등 신군부의 만행이 어느 정도였는 지를 또다시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라고 밝혔다.

이 책에는 전남대병원에 첫 번째 집중사격이 이뤄진 5월 21일에 대한 상황도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김신곤 전남대의과대학 명예교수는 "퇴각을 하던 계엄군이 차량에서 무차별 발포를 하면서 시내를 빠져나갔다"며 "대로변에 위치한 병원 수술실에도 총탄이 날아들어 유리파편이 내 다리까지 튀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정형외과 교수였던 노성만 전남대의과대 명예교수는 "계엄군은 당시 정형외과가 있는 건물을 향해 총을 수평으로 들고 쐈다. 불이 켜져 있는 2층을 보고 사격했으며, 총소리에 누구나 할 것 없이 바닥에 엎드렸다"고 말했다.
당시의 총탄 흔적이 남아있는 노 교수의 캐비닛과 가운은 현재 전남대 5·18연구소와 전남대 의학박물관에 각각 전시돼 있다.
5.18 당시 부상을 입은 환자를 시민들이 옮기고 있다. [사진 5.18 기념재단]

전남대병원은 5·18 민주화운동 37주기를 앞두고 80년 당시 병원에서 환자를 돌봤던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인 28명의 증언을 담은 증언집을 2일 첫 발간한다. 5·18 의료활동에 대해 병원 자체적으로 책을 낸 경우는 전남대병원이 처음이다.

220쪽 분량의 책에는 80년 5월 당시 병원에 실려온 사상자들의 모습과 밤낮없이 진행된 초응급 수술, 시민들의 자발적인 헌혈 참여 등 참혹하고 긴박한 상황이 담겨있다.

전남대병원은 5·18의 중심지인 옛 전남도청과 불과 1㎞ 가량 떨어져 있어 80년 5월 당시 중환자 등이 치료를 받은 곳이다.

광주광역시=최경호 기자 ckhaa@joongang.co.kr

최경호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2017년 4월 24일 월요일

참부모의 부인은 커녕 참종의 부인의 자격조차도 없다(다 말해 인용).

어머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인의 자리에 나가나? 타락한 여자로서 어떻게 참부모의 부인 자리에 나가?

2017.04.19. 22:33



우리 어머니는 얼마나 대담한지 몰라요.
이런 원리원칙을 중심삼고 하늘나라의 천법생활에 들어가게 되면
대번에 걸릴 수 있는 상황이 수두룩한 것을 모르고 마음대로 살아요.
거기에 걸리지 않게끔 내가 울타리를 해줘 가지고 소생시대부터 국가 해방권까지도
어머니를 보호해줄 책임을 지금 하고 있어요.
울타리가 되는 그것이 자기 울타리권과 대등한 자리에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선생님이 만들어준 울타리가 되기 전에는 할 수 없어요.
어머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인의 자리에 나가나?
타락한 여자로서 어떻게 참부모의 부인 자리에 나가?
참종의 부인 자리도 못 되가지고 쫓겨다니고 그래요.
그걸 죽여 버리려고 그러는데 말이에요. 그런 사람을 잡아다가 하나님의 부인 자리에 세워요?
그럴 수 있는 망령된 행동이 어디 있어요?
(말씀선집 614권 28p. '가인 아벨의 전략' 2009.7.12 천정원)

2017년 4월 13일 목요일

세월호 참사 수사 왜곡 한 정치 검찰의 현 주소(미디어 오늘 인용).


[단독] 승객 대기명령 전달한 ‘제3의 휴대폰’ 있었다

[세월호 참사 3주기, 진상규명의 과제들 ②] 드러난 선사 개입-선원 공모관계, 진범 놓친 검찰

문형구 기자 mmt@mediatoday.co.kr  2017년 04월 12일 수요일
    

2017년 4월 10일 월요일

독생교 타령 발본 색원 - 손 대오 박사 코멘트 (다 말해 인용).

2017년 4월 9일 일요일


김진춘 천법원장의 독생자 독생녀 특강에 대한 손대오박사의 코멘트

2017.04.09. 22:08
김진춘 천법원장의 독생자 독생녀 특강에 대한 손대오박사의 코멘트 딕테이션
(2017. 4. 7 협회 8층 강당 원로목회자회 중앙간부 및 지회장단 60여명)

제가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장시간 수고를 많이 하셨고 많은 연구를 하신 터 위에 고민까지 털어 놓으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서 공감하는 마음이 생기네요. 고민이 된다는데 ‘공감한다.’ 그 말입니다.
김박사의 소개를 자연과학을 공부한 물리학자다, 수치를 가지고 컴퓨터를 가지고 말씀을 연구한다고 접근하는데, 저는 그것과는 다른 출신입니다. 저는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이에요. 인문쪽 공부를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접근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저는 아버님 계실 때 아버님과 한 지붕 밑에서 우리 부부가 57년을 살았습니다.
부모님 모시고 둘이서 산 세월이 57년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아버님 재세 시에 자서전을 제가 편집을 하고 아버님께 보고를 드리면서 정리를 했고, 아버님 성화 하신 뒤에는 뒤늦게 합류 했지만 3대 경전 중에 참부모경 편찬을 하는데 제가 관여를 했습니다.

그 전부터 원리강의를 중앙수련소에서 오래 한 경험이 있고, 최근에는 10분짜리 40강좌를 원리를 초심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평일기획에서 동영상으로 찍어서 한 경험도 있는데, 저로서도 오늘 김진춘박사가 그동안 글을 쓴 것과 책이 나온 것, 여러 가지 근거를 대면서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 여기 원로 목회자들이 이런 모임을 통해 강의를 한다는 것을 저는 정식으로 통보를 받지 못했어요. 왜 연락을 안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연락을 안 한 것은 직분을 맡은 분들의 모임이라 그런 것 같은데 그래도 상황이 워낙 중요하니, 김박사가 지난번 기원절에 세계지도자총회 때 학술회의에서 논문발표를 했고, 오늘 배포한 책(“독생자 독생녀 참부모님”)도 지난번 공직자총회 시에 주려고 하다가 안 주고, 이런 것을 봐서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생각해서 제가 오늘 일부러 왔습니다.

저는 오늘 여기서 김박사가 강의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어떤 면에서 우리같이 먹물 먹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을 하는데 딱 그 경우에 해당된다고 봅니다. 예, 너무 들여다보고 너무 연구하고 분석하고 이러다보면 괜히 필요 없는 것을 건드려가지고 더 골치 아픈 일 만드는 이런 일이 생기는 것도 우리가 생각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식구님들이 지금 신앙생활 해 가시는데 이런 거 다 뒤져가지고 가르쳐줘서 알아야 신앙이 좋아집니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아버님을 우리가 워낙 상상만 해보셔도 아버님이 어떤 분이란 것을 알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아버님의 가르침은 태평양 바다처럼 넓고도 깊고 광대무변합니다. 태평양 바닷물 전체를 다 우리가 어떻게 마셔 보겠습니까? 아버님 말씀이 615권이지만 공사석에서 하신 말씀이 그만큼 또 있다고 봅니다. 인쇄가 안 된 것이 말입니다. 저만 하더라도 아버님이 사석에서 하신 말씀들이나 또 누가 녹음해서 보관하고 메모해놓고 있는 말씀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 저런 말씀들까지 다 따져가지고 확인하고 정리한다는 게 보통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나 저는 ‘대 원칙을 우리가 흔들거나 잊지 말자’ 이 말씀 한마디를 강조하고 싶어요. 대 원칙이 뭐냐! 아버님 말씀이 태평양처럼 깊고 넓고 많은데, 이 아버님 말씀과 가르침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기 위한 지표요 나침반을 삼고 가는 대 원칙은 뭐냐, 저는 원리라고 봅니다.

창조원리와 타락에 관한 말씀 그 다음에 탕감복귀원리, 이 원리원칙은 아버님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아버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원리적으로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이 나에게는 없었습니다. 원리를 달통했다고 말하면 이상하겠지만, 원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버님이 어떤 말씀을 하셔도 이해가 안 가서 내 신앙에 문제가 생기거나 원리가 부정되어야 하겠다. 이런 일은 저에게는 없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원리에 대한 인식을 우리가 어떻게 제대로 정확하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창조원리, 타락론, 탕감복귀원리 이런 것을 정확하게 알면, 아버님이 어떤 말씀을 하셔도-방금 김박사가 천사장에게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주었느니, 안 주었느니 이런 말씀까지도-해석이 안 될 것이 없어요. 다 정리 됩니다.
그렇게 볼 때, 이런 대 원칙을 잊어버리고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말씀에만 빠져 들어가면 길을 잃는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 대 원칙을 견지하는 우리 교회원로들이 되어 가지고 우리 후배들에게나 자식들에게나 식구들에게도 정말 대 원칙, 아버님이 말씀하신 원리 원칙을 가지고 해석을 하는 그런 안목을 우리가 많이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오늘 제가 여러 가지 질문 할 것이 많이 있지만, 질문할 것이 아니고 토의 할 내용이라 생각하고 여기서 하나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아버님에 관해서 아버님이 16세 때까지 타락해서 원죄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양면성이 있었다. 이런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아버님이 16세 때 예수로부터 “귀하가 내 뜻, 하나님 뜻을 이어 받아서 재림주의 사명을 이어 받아 주면 좋겠다.” 해서 아버님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해서 결국은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메시아였던 예수님이 당신의 후계자 재림주로 아버님을 선택해서 말씀을 받으라고 해서 받으셨으면 그 아버님이 태어나실 때부터 원죄 있는 혈통으로 16세까지 원죄 있는 아버님이겠냐 말이에요?

이미 아버님이 ‘원죄 없이 태어났다.’ 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예수님으로부터 재림주의 사명을 이어받을 자격이 되는 것이에요. 아버님이 원죄가 있는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아버님이 16세까지 싸웠다 어쨌다, 도를 닦으셔서 원죄를 벗었다, 그런 논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버님 말씀을 다시 찾아보면 언제 아담이 타락 했냐, 16세 때 타락했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럼 태어나서 16세 때 까지는 아담이 하나님 주관권내에 있었단 말입니다. 그게 어디 원죄가 있습니까? 아버님이 16세 때 아버님이 예수님으로부터 재림주의 사명을 이어 받았다는 것이 그 말이에요. 16세 전까지는 아버님도 태어나서부터 원죄 없이 자라오신 터 위에서 재림주님의 자리를 인계 받으시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 과학적으로 DNA를 가지고 얘기해보라, 과학적으로 원죄 없는 것을 증명해 봐라. 그 따위 소리를 떠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아버님의 혈통에 관한 아버님의 말씀이 양면성을 띄는 말씀을 하셨다고 해도 원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거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설명을 못하는 사람은 원리에 관한 이해도가 없거나 무지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해서

원리 원칙은 내버리고 문자주의에 빠져서 아버님말씀을 해석하면서 원죄가 없다고 말할 수없다는 식으로 얼버무리지 말아야합니다.


그런 말들 때문에 요즘은 이상하게 어머님하고 관계시켜가지고 증폭되어서 우리가 감당 할 수 없는 일들까지 벌어지고 있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식자우환을 우리가 만들지 말고 어느 선에서 원리적으로 정리 해 놓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또 원리강론이 한계가 있고 부족하다 이런 말까지 하는데 아니, 원리 해설을 발간할 때도 아버님이 장차 더 많은 계시의 새 말씀을 밝히실 것을 전제하면서 출판한다고 총서론에 분명히 언급하였고, 원리강론 총서론에도 같은 의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잖아요. 원리강론 총서론을 읽어 보세요. 아버님이 그 때까지 밝히신 말씀을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 원리강론이라 했잖아요.

그러면 원리강론 발간이후에 아버님이 수없이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리고 마지막에는 본체론을 그렇게도 강조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 본체론은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섭리의 진전에 따라 나온 기본 경전이 된 원리강론을 엉뚱한 관점에서 폄하하거나 문구적인 지엽말단 문제로 상처를 내는 시도는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런 저런 것을 봐서 이 시간 김진춘박사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너무 이런 것을 말씀 횟수가 어떻고, 또 아버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끝까지 분석해보면 이렇더라 저렇더라 하는 얘기를 이렇게 계속 하는 게 과연 우리 신앙과 앞으로 미래세대를 위해서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을 깊이 좀 하자는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2017년 4월 6일 목요일

전 두환의 군 자위권 행사 발포 명령 근거 자료(프레시안 인용).

전두환 거짓말 입증할 단서가 나왔다
<한겨레> '전 각하' 적힌 군 내부 문서 보도
2017.04.04 08:32:23
전두환 거짓말 입증할 단서가 나왔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전두환 씨가 무력 진압에 직접 관여했다는 군 내부 문서가 나왔다. 

4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육군 제2군사령부(영호남·충청지역 관할)의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에는 당시 군 자위권 발동을 결정한 국방부 회의와 관련해 손 글씨로 "전(全) 각하(閣下): 난동 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적힌 대목이 등장한다. 

이 문건은 80년 5월 2군사령부가 작성한 문건을 기무사가 보관하다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에 제출된 것이라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12·12 및 5·18 재판 법원 기록을 보면, 이 국방부 회의는 80년 5월21일 오후 4시35분에 열렸다. 이 날은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들을 향한 집단 발포가 이뤄진 날이다. 

전 씨는 지난 3일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계엄군 발포 명령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5·18 발포 명령을 둘러싼 의혹을 앞으로 재조사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알츠하이머 썩은 골이 뿜어내는 토악질(프레시안 인용) !

전두환은 회고록으로 5.18을 한번 더 죽였다
[언론 네크워크] 37주년 5.18민중항쟁기념 행사위원회, 법적 책임 물을 것
2017.04.06 17:56:29
전두환은 회고록으로 5.18을 한번 더 죽였다
"찢어 죽여도 모자랄 판에 후안무치한 이번 망발은 진짜 5.18 희생자들을 두 번 죽이고, 우리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놨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최근 공개한 자신의 회고록에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내용을 실어 반발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그는 회고록에서 "나는 광주사태 치유를 위한 씻김굿에 내놓을 제물이었다. 발포명령은 없었다. 양민학살은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부인 이순자 씨 역시 그의 자서전에 '5.18 사태의 억울한 희생자'라고 표현해 논란을 키우고 있다.


ⓒ시민의소리

제37주년 5.18민중항쟁 기념 행사위원회는 6일 옛 전남도청 별관 1층에서 '5월 학살자 전두환, 이순자의 망발을 규탄한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5.18민중항쟁 기념 행사위원회는 "5월 영령들과 광주시민들 앞에 무릎 꿇고 참회록을 바치지는 못할망정 또다시 망발로 5월 가족과 광주시민들을 우롱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행사위는 "지금 우리 국민들은 촛불항쟁의 여세를 몰아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열망에 부풀어 있다"며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국정을 농단한 박근혜를 구속시킨 우리 국민들은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해 나아갈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을 이루지 못한 박근혜, 최순실 사태를 낳았다고 본 우리 국민들은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적폐청산'으로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야 된다고 믿고 있다"며 "멀리는 친일, 가깝게는 유신독재, 군부독재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박근혜에 이르러서는 대한민국 국가 시스템이 붕괴되는 참상을 목격해야 했던 우리 국민들의 뼈저린 교훈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행사위는 "전두환, 이순자 부부의 망발은 우리 사회 적폐청산이 얼마나 절박한 과제인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며 "5.18민중항쟁 기념 행사위원회는 전두환, 이순자 부부의 망발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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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2020년까지 연장된 전두환 추징금 납부 등에 대한 감시를 끝까지해 나아가며 신군부에 역사적 책임을 물어 나아갈 것이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5.18에 대한 폄하와 왜곡을 근절하기 위해서라도 올해는 반드시 5.18국가공인 보고서를 채택하는데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며 "이 과정에서 5.18에 대한 실체적 진상규명과 발포 책임자를 밝혀 낼 것이다"고 다짐했다.

옛 전남도청 별관 복원 문제에 대해선 "5.18 최후 항쟁지이자 유일한 사적지인 전남도청을 복원하는데도 앞장 설 것이다"며 "도청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은 5월 정신과 유산을 후대에게 그대로 물려주는 것으로 되풀이 되지 않을 역사를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 앞서 행사위는 "이번 37주년 기념식에는 대통령이 5.18국립묘지에 참석해 참배를 하도록 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며 "개헌 논의가 있는데 개헌 전문에도 4.19와 함께 5.18도 기록될 수 있도록 힘을 다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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