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7일 목요일

한국형 좌파 포퓰리즘의 시의적절한 등장과 개입을 고민해야 할 때 !

'엘리티즘'은 지고 '포퓰리즘'이 뜬다

[장석준 칼럼] <좌파 포퓰리즘을 위해>
'엘리티즘'은 지고 '포퓰리즘'이 뜬다
9월 9일 실시된 스웨덴 총선은 유럽 대륙을 휩쓰는 극우 포퓰리즘 바람의 위력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스웨덴 민주당(SD)은 이름이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파시스트 운동의 계승자이자 반이민 선동에 주력하는 정당이다. 그런데 이 당이 17.53%를 기록하며 당당히 3대 정당 중 하나로 떠올랐다.

그래도 민주당 득표율이 여론조사 지지율(25%까지 치솟았다)보다는 적게 나왔다며 안도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마음을 놓기는 이르다. 기존 좌파 대표정당 사회민주당과 우파 대표정당 온건당은 모두 지난 총선보다 득표율이 떨어졌다. 반면 민주당은 4% 넘게 올랐다. 온건당과 민주당의 득표율 차이는 이제 2%밖에 안 된다. 우파 제1정당 지위가 민주당으로 넘어가기 일보직전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보루 스웨덴마저 이 모양이니 극우 포퓰리즘은 이제 유럽 정치의 이변이 아니라 대세라 하겠다. 우파 포퓰리즘만이 아니다. 스페인 정치 지형을 바꾼 신진 정치세력 포데모스는 좌파 포퓰리즘이라 분류된다. 그런가 하면 이탈리아에서는 극우 포퓰리즘(동맹당)과 혼종 포퓰리즘(오성운동)이 합작한 연립정부가 들어섰다. 게다가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어쩌면 중도파 포퓰리즘의 예외적 사례일지 모른다.

어지럽다. 좌와 우, 중도를 넘어 웬만한 신생 정치세력은 다 포퓰리즘이라 불리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럴수록 도대체 '포퓰리즘'이 무엇인지 더 헷갈리기만 한다. 어떤 정책이든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포퓰리즘'이라 딱지 붙이는 주류 언론과 지식인들의 관행 때문에 혼란은 더욱 심해지기만 한다.

우리 시대는 '포퓰리즘 국면'이다 

최근 이런 혼돈 속에서 나침반 역할을 할 만한 책이 나왔다. 벨기에의 원로 정치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해(For a Left Populism)>(Verso 펴냄)다. 영어판이 한 달 전에 나왔고, 아직 우리말 번역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번역 작업이 이미 끝나서 곧 출간되리라는 소식이다.

무페라면, 좌파 정치이론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꽤 낯익은 이름이다. 무페는 1985년에 평생의 동반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 2014년에 작고)와 함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급진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를 발표해 좌파 지식인과 운동가들 사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좌파 정치는 곧 노동계급 정치"라는 오랜 상식을 타파하려 했기에 이들의 주장은 환영보다는 비난을 더 많이 받았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두 사람의 작업은 새 시대를 여는 나팔소리였다. 이제는 노동운동이든 여성운동이든 성소수자운동이든 민주주의의 확대를 요구하는 모든 운동이 좌파 정치의 토대라는 게 상식이다. 또한 노동계급 정치라 하더라도 세상의 변화나 다른 민중 집단의 요구와 함께 할 길을 찾지 못한다면 도태되거나 주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 역시 지난 30여 년간의 경험을 통해 생생히 확인됐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은 이 모든 새로운 상식의 주춧돌을 놓은 현대의 고전이다.

저자 중 한 사람인 무페는 현재 스페인의 포데모스와 프랑스의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장-뤽 멜랑숑이 주도하는 신생 좌파 정당)의 이론적 고문 격이다. 무페는 이 두 정치 실험뿐만 아니라 제러미 코빈의 영국 노동당, 버니 샌더스의 미국 민주당 내 민주사회주의 운동에 기대를 걸면서 이들 흐름을 꿰뚫는 특성을 새로운 좌파 정치 노선으로 정리하려 한다. 신작 <좌파 포퓰리즘을 위해>는 바로 이 작업의 결실이다.

<좌파 포퓰리즘을 위해>는 영어판이 100여 쪽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이다. 하지만 논의의 밀도가 높고, 이야깃거리가 풍성하다. 그러면서도 어렵지 않게 읽힌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비롯한 과거 저작들과 비교하면, 이 노학자가 더 많은 대중에게 읽히는 책을 만들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실감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을 내놓는 저자의 마음은 절박하다. 무페에게 우리 시대는 커다란 위험과 반전(反轉)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제목이 선명히 제시하는 이 책의 주제어 '포퓰리즘' 안에 이 두 가능성이 함께 응축돼 있다. 왜 그런지 따지려면, 우선 '포퓰리즘'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예컨대 <조선일보> 지면에서는 복지를 조금이라도 늘리겠다는 정치 세력은 모두 '포퓰리즘'이다. 이렇게 되면 교조적인 신자유주의 추종 세력 말고 나머지 모두는, 그러니까 웬만한 중도우파와 그 왼쪽의 모든 정치 세력은 '포퓰리즘'이 되고 만다. '포퓰리즘' 딱지를 남발하다 21세기 지구상의 정치 9할 이상을 '포퓰리즘'으로 만드는 꼴이다.

반면 무페는 반드시 특정한 어떤 이야기(담론)를 중심으로 정치를 풀어나가야만 '포퓰리즘'이라 할 수 있다고 못 박는다. 그 이야기는 지금 이곳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외침으로 시작된다. 이 위기의 주범은 항상 소수 특권층 혹은 엘리트다. 부와 권력, 지식을 부당하게 독점하는 소수의 무리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이들 때문에 다수 인민/서민/민중(영어로는 그냥 people)이 고통 받는다. 즉, 포퓰리즘의 중핵을 이루는 것은 '소수 특권층+엘리트 대 다수 민중'의 이야기다.

무페는 현실을 이런 틀에 맞춰 설명하고 이 이야기의 한 쪽 항인 '소수 특권층'에 맞서 다른 쪽 항인 '민중'의 결집을 호소하는 정치 흐름만이 포퓰리즘이라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퓰리즘의 역사적 유래를 살펴보면, 무페의 이러한 정의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포퓰리즘의 뿌리를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나로드니키 운동에서 찾는 이들도 있지만, 더 정확한 출발점은 1890년대 미국의 인민당(People's Party) 운동이다. 영어에서 '포퓰리스트(populist)'는 인민당 당원을 일컫는 말로 처음 널리 쓰였다.

인민당은 노동자, 소농, 영세 자영업자들이 공화당, 민주당에 맞서 건설한 제3당이었다. 인민당은 서민 경제를 항구적인 긴축 상태에 빠뜨리는 금본위제 탓에 서민들의 삶이 위기에 빠진다고 봤고, 동부의 소수 대자본가와 엘리트가 오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를 강요한다고 규탄했다. 동시대 유럽의 노동자정당들과 달리 인민당은 '자본주의의 착취'를 말하지 않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했다. 또한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그보다 더 넓은 '민중'의 입장에서 발언했다.

좀 단순화해 말한다면, 이런 미국 인민당의 접근법을 반복하는 정치 흐름이 '포퓰리즘'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세부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로 다른 외관에도 불구하고 기본 도식은 비슷하다. 언제나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소수 세력을 지목하면서 다수 민중의 이름으로 발언하고 행동한다.

역사 속에서 이런 정치 세력은 끊임없이 존재했지만, 유독 2010년대 들어 대세로까지 부상하고 있다. 무페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실패 때문이다. 2008년 금융 위기로 신자유주의 시대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금융화와 지구화가 다수 서민에게도 번영을 보장하다는 신화는 일단 무너지고 말았다. 특히 금융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대서양 양안에서는 대중의 불만이 잔뜩 끓어오른 상태다. 이 불만은 신자유주의 지구화를 주도한 엘리트들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고 엘리트들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제출된 대안인 '제4차 산업혁명' 등등은 자동화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들지 모른다는 불안만 가중시키는 형편이다. 포드주의, 케인스주의가 대공황의 탈출구를 제시했던 1930년대와는 너무도 다르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불안감에 쉽게 전염된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이런 불만과 불안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인터넷, 스마트폰의 발달로 네트워크 사회가 도래하면서 인류는 인쇄 매체 시대나 대중 매체 시대와는 전혀 다른 커뮤니케이션 환경에 놓이게 됐다. 이는 실시간 쌍방향 소통을 통해 참여 민주주의를 북돋을 가능성도 내포하지만, 숙고와 숙의를 멀리 하는 반지성주의의 위험도 안고 있다. 포퓰리즘이 품은 가능성 및 위험과 정확히 대응하는 이중성이다.

우리 시대의 특성이 이러하기에 포퓰리즘이 정치 세계의 대세로 부상하는 것이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을 십분 활용하면서 불만과 불안에 형체와 방향을 부여하는 정치 세력들이 곳곳에서 줄이어 새로운 성공담의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엘리트들의 진단이나 바람과는 달리 이들은 결코 예외적인 일탈이나 유별난 병증이 아니다. 차라리 이는 21세기 초 전 세계 정치의 기본 지형이다. 무페의 정식화에 따르면, 우리는 '포퓰리즘 국면(populist moment)'을 살고 있다.

포퓰리즘의 다른 쪽 가능성, '좌파 포퓰리즘'에 주목한다

포퓰리즘 국면에서 기선을 잡은 쪽은 안타깝게도 국수주의-인종주의를 내세우는 극우파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부터 나치즘 부활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독일대안당(AfD)까지 극우 포퓰리즘이 지구를 뒤흔들고 있다.

그러나 포퓰리즘 아닌 '건전한' 정치와 포퓰리즘 정치를 대비시키는 주류 중도 좌우파 엘리트의 시각으로는 이런 극우파 득세에 맞설 수 없다. 극우 포퓰리즘이 성장할수록 이들은 유권자의 표심을 탓하고 민주주의의 허점을 탄식한다. 대중 투표의 결과가 계속 포퓰리즘 성장 쪽으로 기운다면 대중 투표를 기피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식이다. 브렉시트 투표 결과를 탓하는 영국 리버럴 언론(대표적으로 <가디언>)의 논조에서 이런 심리를 읽을 수 있다.

무페는 실은 이런 주류 엘리트의 반-대중정치적 태도야말로 포퓰리즘 국면을 낳은 직접적 원인이라 지목한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합의한 주류 중도 좌우파는 이 합의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균열을 낼 모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려 했다. 대중정치 무대가 살아 있는 한, 이런 면역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장주의 우파든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주류든 예외 없이 체계적으로 엘리트와 대중의 거리를 벌리고 둘 사이에 유리 장벽을 세우려 했다.

포퓰리즘 국면에 대중은 바로 이 반-대중정치 기조를 뒤집으려 한다. 한 마디로 그들의 정치를 되찾으려 한다. 이제는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는 선언과 함께 정치 의제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쟁점과 관심사들을 다시 정치 무대에 불러들이려 한다. 그러면서 좌든 우든 기존 엘리트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정치 세력에 귀를 기울인다. 불행히도 대서양 양안에서는 이 열망에 극우파가 더 기민하게 부응하고 있지만 말이다.

무페는 여기에서 포퓰리즘의 다른 쪽 얼굴을 본다. 파시즘 부활의 위험과는 정반대의 가능성, 즉 급진 민주주의의 반격이다. 어느 쪽이든 공통 기반은 대중정치의 부활이다. 신자유주의 합의를 타파하고 새 시대로 나아가자면, 이 매개 고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텅 빈 기호인 '민주주의'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비록 그 결과가 21세기판 파시즘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더라도 주류 엘리트의 반-대중정치 관성에 머물다가는 파시즘의 승리를 확정지을 뿐이다.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약이 필요하다.

그 도약을 무페는 '좌파 포퓰리즘'이라 칭한다. 좌파야말로 포퓰리즘 국면을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 특권층 대 다수 민중' 담론은 본래 좌파에게 익숙한 무기였다. 포퓰리즘의 원형인 미국 인민당 자체가 좌파 성향 운동이었다. 좌파는 이 뿌리로 돌아가야 한다. 반-대중정치에 앞장선 '제3의 길' 노선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의 제도적 관계로 대중정치를 대신한 20세기 사회민주주의 정치 또한 넘어서야 한다.

물론 무페가 말하는 좌파 포퓰리즘은 우파 포퓰리즘과 분명히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무페에 따르면, 우파 포퓰리즘이 소수 엘리트의 반대쪽에 '국민 주권'을 중심으로 한 민중을 두는 데 반해 좌파 포퓰리즘은 '인민 주권'을 중심으로 한 민중을 둔다. 전자가 민족주의, 배외주의, 인종주의로 민중을 구성하려 한다면, 후자는 평등, 참여, 시민권(citizenship)으로 이를 시도한다.

무페의 구별을 이렇게 재정리해볼 수도 있다. 우파 포퓰리즘은 '소수 엘리트 대 다수 민중' 담론을 내세우면서 끊임없이 순수한 민중을 선별하려 한다. 외부의 적들에 맞서려면 민중 내부에 침투한 이질적 요소나 그에 부역하는 내부의 적들을 솎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유대인을 공격하고, 무슬림에게 분노하며, 성소수자를 혐오한다. 우파 포퓰리즘은 이들 요소가 제거된 '국민(민족)'의 재구성에서 혼돈의 출구를 찾는다.

좌파 포퓰리즘은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수 엘리트 대 다수 민중' 담론을 전개한다. 좌파 포퓰리즘은 민중을 부단히 확대하려 한다. 이제껏 평등, 참여, 시민권을 보장받지 못한 집단을 발견하고 가시화-세력화해 민중의 범위를 넓히려 한다. 그래서 불안정 노동자와 여성, 소수 민족,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끌어안으며, 이들이 서로 만나는 지점을 탐색한다. 좌파 포퓰리즘의 목표는 이렇게 재구성을 거듭하는 '인민(시민)'의 힘으로 지배 블록과 대결하는 것이다.

무페는 자신이 직접 관여하는 포데모스와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코빈 대표 선출 이후의 영국 노동당과 미국 버니 샌더스 운동에서 좌파 포퓰리즘의 생생한 사례를 본다. 이 중에서 스스로 좌파 포퓰리즘을 거론하는 것은 포데모스 정도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소수 기득권층을 집중 공격하면서 피해 대중의 입장에서 발언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유서 깊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신생 극우 정당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 오직 이들만이 지금 거침없이 전진하는 중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촛불 이후 한국 정치는 대서양 양안 국가들과는 다른 길을 가는 듯 보인다. 가령 유럽과 북미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 합의(그 가장 최근 버전은 긴축이다)를 대변하는 중도 좌우파가 왼쪽과 오른쪽으로부터 협공을 당하고 있다면, 한국에서는 낡은 우파가 나머지 모든 정치 흐름과 사회 세력에 포위된 형국이다. 금융 위기를 직접 겪은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차이일 테고, 어처구니없는 극우 정권 10여 년 뒤에 촛불 항쟁이라는 예외적 사건을 경험한 나라의 특이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서로 닮은 구석도 많다. 촛불 항쟁의 밑바탕에도 소수 특권 세습 세력을 향한 다수 대중의 분노가 있었다. 또한 젊은 세대를 뒤흔드는 불안 심리는 지금 이곳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말하자면, 한국은 이 변화에 가장 민감한 나라 중 하나다. 한국 사회 역시 무페가 말하는 포퓰리즘 국면에 놓여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한국 사회는 유럽, 북미 이상으로 포퓰리즘 정치의 화약고일지 모른다. 단지 본격적인 시작이 늦춰지는 것뿐일지 모른다. 최근 수도권 아파트 값 폭등으로 다시금 적나라하게 드러난 극심한 자산 격차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다. 불로소득 자본주의 경향이 강한 나라일수록 포퓰리즘 정치 지형이 보다 극적인 형태로 등장하곤 한다. 한국은 분명 전자의 첨단에 속한다. 따라서 후자의 운명을 피하기도 쉽지 않다.

한데 부동산 격차 문제가 불거진 지난 몇 주 동안 정의당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심상정 의원의 발언 말고는 어떠한 메시지도, 행동도 없었다. 비상한 시국에 전혀 비상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이런 나태하고 안이한 태도가 지속된다면, 대중의 불만과 불안은 전혀 다른 곳에 닻을 내릴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 선례를 본다면, 그곳은 십중팔구 신진 우파 포퓰리즘 세력일 것이다.

촛불 이후 한국 정치의 결말이 이래서는 안 된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이 점에서 우리도 무페가 (어쩌면 마지막 저작이 될지 모를) <좌파 포퓰리즘을 위해>에 남긴 절절한 권고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한국형 좌파 포퓰리즘의 시의적절한 등장과 개입을 고민해야 할 때다.

보이지 않는 < 시장의 손 >은 금융을 중심으로 한 자본 욕망의 추악 한 < 악마의 손 >이다 !



"2008년보다 더 큰 금융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해외시각] 글로벌 금융위기 10년, 세상은 과연 달라졌나?
2018.09.26 14:08:47
"2008년보다 더 큰 금융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위기는 터지기 전까지는 알지 못하는 특성을 지녔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경제는 거품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 거품을 주도하는 기득권 세력은 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말하지 않는다. 또한 위기가 터져도 상관없다. 죽어나는 것은 중산층과 서민이기 때문에 기득권 세력은 정부를 움직여 탄력적으로 회복한다. 중산층과 서민은 다시 죽어난다.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한 지 10년이 지났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위기는 더 큰 위기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위기를 경험했다고 해도 더 큰 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역시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이런 위기를 주도하는 기득권 세력이 침묵하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경제는 지난 10년 중 가장 탄탄한 지표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속성이 이제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뉴욕 증시 대표지수들은 지난 8월말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 2.4분기 미국 경제 성장률은 4.1%(연율)에 달했다. 실업률은 4% 밑으로 떨어졌고, 임금도 오르고 있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이 평균을 보여주는 각종 경제 지표와 통계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을 뿐이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해 미국의 주요 매체와 일부 전문가들은 금융위기 10주년을 맞은 다양한 분석들을 통해 '태풍 전야'를 경고하고 있다. 더 큰 위기가 수면 위에서 솟구칠 에너지를 키우는 중이라는 것이다.

폭발적 에너지는 불균형에서 나온다. 자본주의 위기의 핵심도 불균형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미국의 경제는 금융위기 10년 동안 더욱더 중산층과 서민 경제의 붕괴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 상황과는 다소 다를 수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결코 남의 얘기라고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10년 후' 현재 미국 경제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정리해 소개한다. 편집자 

▲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지난 2008년 9월 15일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했다는 소식에 뉴욕증시 트레이더들이 충격을 받고 있다. ⓒAP=연합

"미국에서 노동으로 성공하겠다는 것은..."

<뉴욕타임스>는 '중산층의 꿈이 무너진 경제회복(The Recovery Threw the Middle-Class Dream Under a Benz)'이라는 특집기사(☞원문보기)를 통해, 미국 경제의 회복 과정에서 부의 축적 측면에서 장기적인 불균형은 더욱 커졌다"면서 "그 결과 확실한 부의 축적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미국 경제 시스템에서 진정한 부의 축적은 더 이상 연봉에서 나오지 않는다. 주식시장 상장, 스톡옵션, 주식 매매 등으로 부가 축적된다. 이런 변화 속에서 미국의 가구에서 벌어들이는 임금 소득은 급격히 감소했다. 지난 15년간 미국연방준비제도(Fed)의 통계에 따르면, 가구 임금 소득은 70% 가까이 줄었다.

신문은 "주식 등 거래 가능한 자산을 보유한 미국인들이 누려온 경제회복을, 저축이나 임금소득에 의지하는 미국인들은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라면서 "매일 일터에 가서 일하는 노동으로 성공하겠다는 것은 요즘 시대에 전화번호 찾겠다고 전화번호부를 뒤지거나 영화 한 편 보겠다고 비디오숍을 찾는 것처럼 기묘한 일이 되었다"고 개탄했다.

임금 소득이 더 이상 부의 축적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뿐이 아니다. 미국의 중산층과 서민들은 '내집 마련'이 주는 부의 증식 효과와 자부심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이제 집은 많은 빚을 지면서 구입해도 항상 가격이 오르는 자산이 아니다. 10년전 미국발 금융위기는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집값보다 120%나 많은 대출까지 해주면서 부풀어졌던 주택시장 거품 붕괴로 시작됐다. 지금 미국의 많은 중산층과 서민들은 집이 경매로 처분되거나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있다.

Fed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구의 순자산은 2007년보다 낮은 4만 달러 정도다. 미국의 중산층이 받은 정신적 충격은 값으로 따질 수 없을 정도다.

은행들도 금융위기로 타격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리먼브라더스처럼 파산을 한 몇몇 사례를 빼고, 은행권의 타격은 일시적이라는 것이 큰 차이다. 은행들은 그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은행이 무너지면 자본주의 금융시스템이 무너진다는 이유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부 차원에서 총력 지원을 해줬기 때문이다. 주주와 투자자들 역시 구제금융으로 지원받았다.

제로금리와 대대적인 통화 팽창 정책으로 Fed는 주식시장에 내려가고 싶어도 내려갈 수 없게 만드는 '트램펄린'을 깔아주었다. 인위적인 통화정책 지원으로 경제가 회복됐지만, 그 혜택은 주식이나 연금 등 상대적으로 자산이 많은 미국인 절반 정도에 돌아갔을 뿐이다.

금융위기 이후 10년 동안 중산층과 서민 사이에서도 경제회복의 혜택은 크게 달랐다. 고용시장에서도 실업률이 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기까지 노동자들의 임금은 오르지 못했고, 기업의 수익만 치솟았다.

트럼프 당선과 브렉시트는 금융위기 극복 과정의 결과물

신문은 "미국인의 절반은 임금이 정체된 반면, 나머지는 자산시장에서 부를 얻은 결과가 바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영국에서 유럽연합(EU) 탈퇴를 국민투표로 결정한 것은, 금융위기 이후 경제회복 과정에서 소외된 유권자들의 분노가 쌓여오면서 폭발한 결과라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체제의 부의 양극화를 진단한 <21세기 자본주의>의 저자 토마스 피케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계층간 빈부격차가 줄어들고, 계층 상승의 경제적 기회가 확대되면서 중산층이 형성됐지만, 수십년간 지속된 이 현상은 궤도를 이탈했다"면서 "빈부 격차가 역사적 수준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신문은 "피케티의 주장이 옳건 그른건, 금융위기의 유산인 부의 집중 현상은 갈수록 체감하게 될 것"이라면서 "특히 1929년 대공황이 20세기를 관통하며 당대 세대들을 짓눌렀던 것처럼,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젊은 미국인들도 비슷한 세대로 기록될 것"이라고 짚었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은행의 최근 연구는 "금융위기 동안 모든 세대들이 부를 잃었지만, 1980년대생 미국인들이 '부의 축적 면에서 잃어버린 세대'가 될 위험이 가장 크다"고 밝혔다.

미시간 대학교 사회학자 파비언 페퍼는 "갈수록 가계의 자산은 임금소득보다 향후 세대의 기회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면서 "가계의 자산은 다른 선택과 다른 계획을 감당할 여유를 주는 사적인 안전망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일자리를 잃어도 자신에게 맞는 기회를 기다릴 수 있다. 부모의 재력을 의지할 수 있다면, 학비가 비싼 대학에 진학하고 빚을 지는 데 따르는 리스크는 낮아진다는 것이다.

'대마불사' 혜택 받고 더 커진 대마들

다국적 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필리핀 사회학자 월든 벨로는 '위기 후의 위기:금융붕괴 후 10년, 세계 자본주의 개혁은 없다(Crisis After Crisis: 10 Years After the Crash, There’s No ‘Reforming’ Global Capitalism)라는 글(☞원문보기)에서 더 큰 파괴력을 지닌 금융위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필자는 그 근거로 세가지를 꼽았다.

첫째, '대마불사'의 논리로 살아난 미국의 대형은행들은 이 논리의 혜택을 누릴 더 큰 대마기 돼었다. JP모건체이스, 웰스파고, 뱅크오브아메리카,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등 이른바 '미국 6대 은행'은 2008년에 비해 수신액은 43%, 자산은 84%, 현금보유액은 3배가 늘어났다.

둘째, 2008년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파생상품은 여전히 거래되고 있다. 대표적인 파생상품인 주택저당증권(MBS)만 6조 7000억 달러에 이른다. Fed는 1조 7000억 달러를 투입해 이 상품의 가치를 떠받쳐주었다.

미국 은행들은 157조 달러에 달하는 파생상품을 운용하고 있다. 전세계 GDP의 두 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물량이다. 2008년 금융위기 초기보다 12%가 늘어난 것이다. 시티그룹 혼자 금융위기 전에 비해 50% 이상 늘어난 44조 달러어치를 보유하고 있다.

셋째, 전세계 조세회피처에 은밀한 자금들이 엄청난 규모로 떠돌고 있다. 조세회피처에 100조 달러로 추정되는 슈퍼리치들의 자산이 헤지펀드 등 20개의 펀드에 집중돼 있다.

넷째,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통화팽창 정책으로 뿌려진 값싼 유동성으로 전세계의 부채는 글로벌 GDP의 세배 이상인 325조 달러에 달한다. 이런 부채 증식은 폭발적인 파열없이 무한정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필자는 "또다른 금융위기가 어느 곳에서 폭발할지 예측하기는 힘들다"면서 "하지만 몇몇 후보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필자에 따르면, 중국이 가장 유력하다. 중국 경제가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진 미국과 비슷하게 곪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시장 과열, 요동치는 주식시장, 급증하는 그림자금융은 중국이 새로운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될 것을 경고하는 3대 증후군이다.

중국의 그림자금융은 아직 월스트리나 런던처럼 정교한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으며, 현재 10조~18조 달러 규모로 추정되고 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주식과 부동산처럼 변동성이 큰 자산시장에서 중국의 그림자금융 위험자산 규모는 중국의 GDP 대비 53%에 달했다. 글로벌 평균이 GDP 대비 120%라는 점에서 규모가 작아보일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그림자금융이 특히 위험한 이유는 제도권 금융에서 끌어온 부채 비중이 크다는 점이다. 그림자금융의 부실채무의 절반은 제도권 금융으로 위험이 전가될 수 있다.

세계 경제에 중국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오늘날 중국발 금융위기는 중국의 실물경제에 타격을 주고, 다시 전세계에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트럼프 정부에서 벌어지는 '비이성적 과열'

<포린폴리시인포커스>의 존 페퍼 소장은 '새로운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There’s a New Crash Coming)'이라는 글(☞원문보기)에서 미국발 금융위기 재발을 경고했다.

필자는 트럼프 정부 들어 각종 경제지표가 좋아보이는 것이 트럼프의 정책 효과와는 관련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비이성적 과열'을 보여주는 증후군이라면서, 미국에 또다시 금융위기가 터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글에 따르면, 미국의 재정적자는 전임 오바마 정부말 6600억 달러에서 올해 8900억 달러로 증가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내년에 1조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재정지출은 타당한 정책일 수 있지만, 트럼프의 재정적자 지출은 부자에게 혜택이 집중되는 효과를 줄 뿐이다.

미국은 정부뿐 아니라 가계도 빚더미에 올랐다. 가계 총부채는 지난 8월 13조 3000억 달러로 사상 최대 규모로 불어났다. 이 가계부채는 1조 5000억 달러에 달하는 학자금 채무, 9조 달러에 이르는 주택담보대출(2008년 금융위기 당시 10조 5000억 달러에 육박하는 수준), 사상 처음으로 1조 달러를 돌파한 신용카드 대금 등이 포함된 것이다.

기업 부채도 증가했다. 지난 여름 기업 부채는 사상 최대규모인 6조 3000억 달러에 달했다. 기업의 부채 대비 현금 보유 비율은 2008년 14%에서 12%로 떨어졌다.

국내외에서 미국의 국채를 매입하고 보유하는 흐름이 이어지는 한 미국의 재정적자 지출로 인한 문제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 등 일부 국가들이 최근 움직임을 보이고 있듯, 지속불가능한 미국의 지출을 지지하지 않아 중국 등 미국 국채를 대량 보유한 국가들까지 미국 국채를 일제히 매각하는 순간이 올 수 있다.

미국 경제에 대한 외국의 신뢰가 감소하고 있다는 신호는 또 있다. 국제거래에서 미국의 달러가 결제수단으로 쓰이는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 지난 7월 기준, 달러 결제는 39%에 그쳤다. 유로가 35%로 2위, 그 다음으로 파운드, 엔, 위안화가 국제결제에 쓰였다.

파시즘이냐 민주사회주의로 가느냐의 대결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금융위기가 발생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하는 과제는 쉽지 않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속성이 관철되는 글로벌 경제체제에 대해 금융위기를 막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더 큰 이윤에 대한 탐욕 등 자본주의의 또다른 속성들이 제어되지 않고는 변화는 일어날 수 없다.

금융경제 발전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요인은 실물경제다. 새로운 관점은 아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은 금융경제의 위기는 실물경제에서 과잉생산, 불평등 확대에 따라 수요보다 공급이 초과하는 근본적인 모순의 결과라고 지적해 왔다.

흥미로운 것은 자본주의 체제 경제학자들도 실물경제의 수요부족이 지난 20년간 '구조적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의 원인이라는 진보적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평등에 의한 실물경제의 수요부족이 문제라면, 통화팽창과 초저금리 등 금융당국이 취한 조치들은 일시적으로 위기를 봉합할 수 있어도 중장기적으로 위기를 심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아무리 금융분야를 개혁해도, 자본이 침체된 실물경제보다는 금융에서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을 끝까지 억누를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월든 벨로는 자본주의 체체 개혁방안을 모색하는 몇 가지 시각을 소개했다. 하나는 불평등에 따른 수요부족를 해결하기 위한 자본주의 개혁이 시급하다는 시각이며, 또 하나는 자본주의 개혁을 위한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자본의 탐욕이 가장 큰 문제라는 시각이 있다.

이와 함께, 사회적 불평등뿐 아니라 생태계를 희생시키며 성장하려는 자본주의의 파괴적 속성도 제어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이들은 기후변화의 재앙으로 더욱더 대안 자본주의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벨로는 "분명한 것은 세계화 이후 체제는 두 정치세력의 투쟁 결과에 달렸다"고 말한다. 한 진영은 국가가 경제를 관리하지만, 자본주의 생산방식은 물론 계급 불평등 문제까지 건드리지 않는 방어적 프로그램을 옹호한다. 이 프로그램은 민족, 혈연, 인종에 기반해 차별적인 특권을 보장하는 사회다. 이민자에 대한 국경 폐쇄 정책도 포함된다.

다른 진영은 경제에 대해 국가와 시민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을 지지한다. 급진적인 소득과 부의 재분배 등을 강력히 추진하는 등 자본주의를 탈피하며, 이민자를 환영하고, 민주적 절차를 옹호한다. 

벨로는 "두 진영의 대립은 파시즘과 민주사회주의의 대결이라고 규정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모순은 이제 거대한 정치투쟁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사람 살 만 한 아름다운 일상 생활의 사회를 건설 하기 위한 제언 !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갑질사회'가 된 까닭은...

[기고] 이 나이에도 못 배운 것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갑질사회'가 된 까닭은...
사람들이 즐겨 걷는 도시 근교의 둘레길은, 대개 성인 세 명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서면 꽉 찰 정도의 너비로 되어 있다. 세 사람이 팔을 자연스럽게 흔들면서 오고 가기에는 다소 좁다는 의미다. 그러니 누군가 혼자 둘레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반대 쪽에서 성인 두 명이 나란히 걸어오면 필경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상체를 살짝 도사리면서 비켜가야 된다. 누가 몸을 비켜야 할까? 혼자 걸어가는 사람? 혹은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중 한 명? "네?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요? 세상에!"

동네 뒷산에 있는 둘레길을 가보면 비가 조금 오는 날에도 우산을 받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 날 혼자 우산을 받고 걸어가고 있으면, 반대쪽에서도 우산을 받고 오는 사람과 좁은 산책길에서 엇갈리게 될 것이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쳐도 서로가 부딪힐 염려가 없지만, 두 사람 모두 우산을 받고 있을 경우에는 각자 가장자리로 약간 옮겨 걸음으로써 우산끼리 부딪히지 않도록 할 것이다. "네? 그런 자잘한 것에 신경쓰지 않고 그냥 당당하게 걸어가면 상대가 알아서 피한다고요? 세상에!"

좁은 골목길, 혹은 이상하게도 아주 좁게 만든 도로 옆 보도를 걸어가다 보면,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과 팔을 부딪히지 않도록, 지나칠 때 한 쪽 팔을 조심스럽게 내 몸쪽으로 붙이거나, 아예 엉덩이 뒤쪽으로 팔을 조금 밀어넣게 된다. "네? 무슨 죄 지었냐고요? 상대에게 꿀리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야 하느냐고요? 세상에!"

도서관이든 관공서건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면 여닫는 현관문들이 한결같이 크고 무거워서 새삼스러워질 때가 있다. 그 무거운 문은 앞 사람이 밀고 들어간 후에 놓아버리면 도로 뒤 쪽으로 닫히는 힘이 상당하다. 그래서 내 뒤로 사람이 따라 들어오는 기척이 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뒤를 한번 슬쩍 본 후, 혹 누가 뒤따라 오면 그 육중한 유리문을 그냥 놓지 않고 가볍게 잡고 있다가 뒤따라오는 사람이 문을 잡은 후에 손을 떼게 된다. 몇 미터 뒤에 사람이 오고 있다면, 그렇더라도 잠시 문을 잡고 있다가 마치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인계하듯이 조심스럽게 잡은 문을 넘기게 된다. 뒤따라 오는 사람은 아! 오늘따라 하늘의 구름이 너무 멋있어, 라는 생각이 들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네? 한번도 그래 본 적이 없다고요? 그러면 내가 마치 구차한 '을'이 된 것 같아서 싫다고요? 세,세상에!"

둘레길을 산책하든, 도심을 걷든, 혹은 어떤 건물 안으로 들어가든,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에서 내가 남을 배려하는 것은 크게 특별한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그 배려를 받는 상대방에게 이러한 행위는 아주 특별하게 다가온다.

단지 같은 사회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내가 이름도 모르는 어떤 타인으로부터 배려받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그 날따라 흰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이 유난히 파랗게 보이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초등학교와 가정에서 당연히 배워야 했던 것들이다.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는 내 또래 성인들이 유치원에서, 그리고 초등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그것'을, 어렸을 적 부모에게 배웠어야 했을 '그것'을 학교도 부모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더 늦기 전에 어딘가에서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젊은 세대와 지금 자라고 있는 아이들은? 글쎄…)

도대체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는 연예인 가십거리와 보고 싶지도 않은 온갖 오락과 쇼로 가득찬 프로그램과 뉴스를 쏟아내고 있는 언론방송이 이제 이 역할을 담당해 주기를 바란다. 어디를 가야 맛집이 있고, 어느 연예인이 결혼했고, 어느 가수가 얼마짜리 빌딩을 산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최소한 공영방송에서는 이런 프로그램들이 아예 없어지기를 바란다. 대신 그 자리를 교양 프로그램으로 채워주면 좋겠다. 자체 제작하든 해외의 그 고급스런 교양 프로그램을 사오든 말이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 사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교통질서를 제대로 지키며, 환경을 보존하고, 학교에서 객관식 문제풀이를 이제 당장 집어치워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자각'하게 될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이 국회의원, 기자, 판검사, 의사, 교수가 되어서는 안되는지에 대한 확실한 '분별력'을 갖게 될 것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갑질사회'가 된 우리사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가 무시되어서 그런건 아닐까? 늦었지만, 이제라도 정말 '그것'이 알고 싶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권력분립과 법관의 독립 규정한 대한민국 헌법파괴 범죄행위 ===> △법관 탄핵 △국회의 국정조사 △특별재판부 설치로 단죄 ===> 법원 적폐 청산 !


법관 탄핵 ‘레드카드’ 이제 꺼낼 때 됐다




사법농단 줄줄이 기각에 

“법관 견제할 유일 장치”… 


일본 48건, 

미국 연방대법관만 15건 탄핵소추

김예리 기자 ykim@mediatoday.co.kr  2018년 09월 27일 목요일

2018년 9월 26일 수요일

5.18 북한군 개입 소설 쇠뇌 공작 ! ====> 뇌 세포 연결 회로 파괴 되고 뇌 세포가 썩어 구멍 난 빈골을 소유 한 돈 골들의 작당 공작 역사.


1980년 광주에 있었다는 


북한군 김명국씨를 찾습니다



5년 전 ‘5·18 광주 북한군 투입설’ 주장한 

탈북자와 방송사는 

제대로 처벌 받았나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2018년 09월 26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