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光州 虐殺
主動
保安司
全 두환의
射殺 命令
光州 現地 指令
國會 公開 證言한
當時
美 陸軍 情報官과
保安司 特命 部長 .
保安司
僞裝 特殊 工作 部隊의
光州 虐殺 主動 行爲를
北漢 軍 特殊 部隊라고
謀略
逆 工作 하는
만원이와
亡國黨 및
麾下의 들쥐들은
하늘과 땅의 震怒가
가까이 닥아 오는 것을
驚愕과 恐怖로 두려워
잠을 설쳐야
人두껍을 둘러 썼다고
骨을 들고 다닐 수
있다.
1980년 광주, 美정보요원 39년만에 입을 열었다
“광주 방화·총격·차량 탈취는 30~40여명의 사복 입은 남한특수군이 벌여”
“5월21일 전두환 광주 방문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사살 명령 내렸을 것”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2019년 05월 13일 월요일
“기자들 허벌나게 와버렸네.” (5·18기념재단 관계자)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며 1980년 민주화운동을 모욕한 자유한국당 공청회가 2월8일 국회에서 열린 지 약 2개월 만에
국회에서 5·18 가짜뉴스의 실체와 광주학살 진상을 규명할 매우 중요한 증언이 나왔다.
전두환씨가 철저한 시나리오를 갖고
1980년 5월, 광주시민을 짓밟았다는 주장이
39년 전 미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의 입을 통해
구체적으로 등장했다.
김용장 전 미국 육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과
허장환 전 국군 보안사령부 특명부장이 참석한
특별기자회견이 13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이인영 더불어민주당과 박광온 최고위원을 비롯한 민주당 관계자들과
5·18기념재단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미 육군 501정보여단에서 군사정보관으로
25년간 재직한 김용장씨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1980년 5월 광주에서 대략 40여건의 첩보를 상부에 보고했다.
501정보여단의 첩보는 미 국방정보국으로 보내졌고,
이 첩보는 백악관으로 갔다.
내가 보낸 첩보 중 5건은 백악관으로 보내졌고 카터 대통령이 3건을 직접 읽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 김용장 전 미국 육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과 허장환 전 국군 보안사령부 특명부장이 참석한 특별기자회견이 13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렸다. ⓒ미디어오늘 |
“사실이라면 미국의 정보망이 완전히 뚫렸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라며
“전두환이 만든 완전한 허위”라고 단언했다.
그는 “(1980년 당시) 한반도 상공에는 2대의 첩보 위성이 있었고 북한과 광주를 집중 정찰했다.
북한군 수백명이 미국의 첨단 감시망을 뚫고 내려오는 건
불가능하다”며 “(상부에)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가 보고했던 것은 오히려
‘남한 특수부대원’의 수상한 활동이었다.
김용장씨는
“시민 행세를 하던 사복 군인이 실제로 존재했다.
이들은 5월20일쯤 성남비행장에서 광주비행장으로 왔다.
(인원은) 30~40명가량으로 보고했다.
K-57 비행기 격납고에서 3일간 주둔했다.
(주둔)첩보를 입수해 격납고로 찾아가 직접 확인했다.
나이는 20~30대 젊은이로 짧은 머리였고 일부는 가발을 썼다. 그중에는 거지처럼 넝마를 걸친 이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들을 광주로 보낸 이는 전두환 보안사령부였다.
보안부대 대공과장이 이들을 지휘했다”고 말했으며
“북한 특수군이 했다는 방화·총격·수송 차량 탈취는
일반 시민이 했다고 보기 어려운 매우 극렬한 행위인데,
나는 이들을 남한 특수군으로 부르고 싶다.
이들이 직접 벌인 소행으로 추정한다”
고 말했다.
김씨는
“전두환이 강경 진압의 빌미를 마련하기 위해
남한군을 시민으로 위장해
고도 공작을 펼친 것이다.
유언비어 유포도 마찬가지다”라며
5·18 가짜뉴스의 실체에 쐐기를 박았다.
▲ 김용장 전 미국 육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과 허장환 전 국군 보안사령부 특명부장이 참석한 특별기자회견이 13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렸다. ⓒ미디어오늘 |
“광주MBC 방화 같은 사건이
광주시민에 의해 이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한 특수공작원에 의해 이뤄졌다고 확신한다”
고 말했다.
김씨 주장이 사실이라면
‘5·18 북한군 개입설’은
‘5·18 국군 개입설’로 바뀌어야 한다.
김씨는 “이들의 실체가 드러나면
광주의 모든 실체가 드러날 것”
이라고 강조했다.
김용장씨는 이어
전두환씨가 1980년 5월21일 광주에 왔었다
고 강조했다. 그는
“전씨가 5월21일 점심 전후로 광주비행장에 왔다.
당시 헬기를 타고 왔다.
오자마자 1시간가량 회의를 열었다.
움직일 수 없는 사실”
이라고 말한 뒤
“(방문한) 이날 오후
집단 사살이 이뤄졌다”
며 “(전두환) 방문 목적은
사살 명령이었다
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그는 전씨가 타고 온 헬기의 비행계획서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밖에도
△광주 국군통합병원 시신 소각
△전일빌딩 헬기 M60 사격
△교도소 습격
△공수부대에 의한 성폭행 등을
첩보로 보고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시신 소각과 관련해
“당시 국군통합병원에서 시신을 최대로 소각했다면
10일간 200구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뒤
“그래도 그 숫자는 터무니없이 적은 (사망자) 숫자이기 때문에
어디론가 (시신이 또) 수송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 김용장 전 미국 육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과 허장환 전 국군 보안사령부 특명부장이 참석한 특별기자회견이 13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렸다. ⓒ미디어오늘 |
허장환 전 국군 보안사령부 특명부장은 이날
“전두환은 발포가 아니라
사살 명령을 내렸다.
5·18 당시 전두환은 모든 작전권을 갖고 있었다”
고 말했으며
전일빌딩 헬기사격엔
“27일 공수특전단 지침이
진압군에 사상자가 나와선 안 된다였다.
그런데 전일빌딩 5층에 저격병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해
헬기로 저격병 저격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고 주장했다.
김용장씨가 주장한
‘남한 특수군’ 과 관련해 허장환씨는
“수백명 이 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때 그 때 와서 (임무 수행 뒤)
철수한 것으로 안다.
그 사람들은 전쟁이 벌어지면
후방교란이 주 임무로,
유언비어날조 조도 있었다”
고 전했다.
시신 소각과 관련해선
“시민군 사상자 중 간첩이 있을 수 있다며
전남도청에서 지문 감식을 진행했고
가매장을 발굴해 사망자의 지문까지 채취했는데
다시 묻을 수 없어 국군통합병원에서 화장 처리했다.
그 공로로 병원장이 훈장까지 받았다”고 주장했다.
허씨는 “보안사가 광주를 평정한 뒤 범행을 숨기기 위해
연구단을 만들어 시나리오를 기획·작성했다.
작성자들은 죽어서도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들의 목적은 완벽하게 역사를 변조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연구단을 통해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해당하는 만큼의 변조”가 이뤄진 결과
39년째 5·18 학살의 진상규명이 미궁에 빠졌다고 덧붙였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마침내 진실이 때가 돼 스스로를 드러낸 현장이다. 지금껏 날조되었던 5·18의 진실이 다시 밝혀졌다”고 말했다. 박광온 민주당 최고의원은 “정권찬탈세력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이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분의 증언은 진상규명을 원하는
이들과 5·18 진상조사위 활동에 강력한 동력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5월21일
전두환이 광주에 왔고,
오후에 사살이 이뤄졌다"
前 미군 정보관 증언…
"사복군인 30여명 목격,
시민으로 위장 공작"
2019.05.13 16:51:27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헬리콥터를 타고 광주를 방문해
군 관계자들과 회의를 했으며,
이 회의 직후
광주시민에 대한
대대적인 사살 행위가 이뤄졌다
는 증언이 나왔다.
1980년 당시 미 육군 501 정보여단 광주파견대에서 군사정보관으로 근무했던 김용장 씨는 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김 씨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1980년 5월 21일 점심시간 전에 헬기를 타고 광주 K57 비행장에 왔다"며 "오자마자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부대장 등 3명과 모두 4명이서 회의를 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5.18 특조위나 언론이 비행계획서를 찾아보면, 파기되지 않은 한 절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며 이같이 증언했다. 김 씨는 "이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모른다"면서도 "그러나 같은날 오후 1시 도청 앞에서 집단 사살이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1980년 당시 미 육군 501 정보여단 광주파견대에서 군사정보관으로 근무했던 김용장 씨는 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김 씨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1980년 5월 21일 점심시간 전에 헬기를 타고 광주 K57 비행장에 왔다"며 "오자마자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부대장 등 3명과 모두 4명이서 회의를 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5.18 특조위나 언론이 비행계획서를 찾아보면, 파기되지 않은 한 절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며 이같이 증언했다. 김 씨는 "이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모른다"면서도 "그러나 같은날 오후 1시 도청 앞에서 집단 사살이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전두환의 방문 목적은
바로 사살 명령
이었다고 생각된다"고 주장했다.
"한국국 특수부대,
"한국국 특수부대,
민간인 행세하며
시민·진압군 충돌 유도"
김 씨는 또 당시 한국군 특수부대원으로 추정되는 군인 30여 명이 거지 등 민간인으로 변복·위장한 모습으로 K57 공군기지에서 목격됐으며, 이들이 광주 시내에 잠입해 광주시민들과 진압군이 무력 충돌을 일으키도록 선동·조작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씨는 "제가 직접 작성한 보고서에 있는 내용으로, 일명 편의대(便衣隊)라 불리는 사복 차림의 민간인 행세를 한 군인들이 존재했다"며 "이들은 19일 또는 20일 성남에서 C130 수송기를 타고 왔고, 약 30~40명가량이었으며 K57 비행장 격납고에서 2~3일 주둔했다"고 밝혔다.
김 씨는 "이 첩보를 입수한 후 격납고로 찾아가 제 눈으로 확인했다. 나이는 20대 혹은 30대 젊은이들이었고, 짧은 머리에 일부는 가발을 썼다.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고, 거지처럼 넝마를 걸친 사람도 있었다"고 비교적 자세하게 자신이 목격한 바를 증언했다.
김 씨는 "이들을 광주로 보낸 사람은 바로 전두환의 보안사령부였고, 당시 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과 서의남 505부대 대공과장이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 K57에 출입했다. 여기까지가 제가 상부(미군)에 보고한 내용"이라고 밝혔다.
단 김 씨는 이들의 신원을 직접 확인하거나 대화를 나눠본 것은 아니며 "얼굴이나 움직임을 봐서 군인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이들이 C130 수송기를 타고 왔고, 버스를 타고 광주 시내로 들어갔다. 그들이 격납고에 들어가 있을 때 우연찮게 밖으로 나온 사람이 2명 있어서 30미터 거리에서 그 2명의 얼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김 씨는 이들이 온 이유에 대해 "북한 특수군이 했다는 방화, 총격, 장갑차·수송차 탈취는 일반 시민이 했다고 보기 어려운 매우 극렬한 행위들인데, 이 편의대가 선봉에서 시민을 유도하거나 직접 벌인 소행으로 추정한다"며 "유언비어 역시 이들이 시민으로 위장해 벌인 공작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사람들의 역할은 시내에서 데모 군중 속에 들어가 '경상도 군인이 광주시민 다 죽이려 한다', '북한 게릴라가 침투했다' 등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우리가 낸 귀한 세금이 전부 군사정부에 사용된다'고 광주세무서에 불을 지르고, 'MBC는 허위방송이 너무 많다'며 (방송국에) 방화를 한 것"이라고 추정하며 "편의대, 남한 특수공작원 의해 이뤄졌다고 저는 확신한다"고 했다.
1980년 당시 보안사령부 특명부대장으로 근무했던 허장환 씨는 "1988년 광주 청문회를 보면,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이 광주 방문 목적에 대해 '대원들에게 편의복을 가져다주러 갔다'고 증언했다"며 "편의대의 존재를 정호용이 인정했다는 중요 발언"이라고 부연했다.
"북한군 침투설은 난센스…희생자 시신 화장, 수장 가능성"
김용장 씨는 한편 북한 특수군 침투설 에 대해서는
"허위 날조된 것
"이라며 "북한군 600명이 광주에 왔다는 주장은 미국의 정보망이 완전히 뚫렸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600명이 (미국 정보자산의) 첨단 감시를 피해 광주에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따라서 당시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했다는 보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광주 희생자 시신에 대해
광주 희생자 시신에 대해
신군부가 무단으로 화장하거나
심지어 시신을 김해공항으로 옮겨 바다에 수장했다는
정황에 대한 증언도 나왔다.
김 씨는 "5공 청문회 때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이
'암매장은 없었다.
다만 있다면 가매장은 있었다'고 했는데,
당시 청문회를 들은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을 것"이라며
"가매장한 시신을 재발굴해서
일부는 광주통합병원에서 소각했고,
일부는 최근 보도를 보면 김해 공항으로 수송됐다고 한다.
왜 김해로 갔겠는가,
틀림없이 거기서 수장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허장환 씨도 시신에 대해 비슷한 증언을 했다. 허 씨는
허장환 씨도 시신에 대해 비슷한 증언을 했다. 허 씨는
"가매장은 다시 발굴하기 위해 일단 묻어놓는 것"이라며
"당시 공수특전단에서 (보안사에) 가매장 위치, 좌표를 표시해 면밀히 보고했는데, 이는
'북괴의 간첩이 있는지 엄중히 가려내라'는
지시에 따라
지문을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고 증언했다.
허 씨는 "나는 지문 감식관 이름도 기억하고 있다"며 "발굴한 시신을 다시 묻을 수 없으니 통합병원에서 화장 처리했다.
허 씨는 "나는 지문 감식관 이름도 기억하고 있다"며 "발굴한 시신을 다시 묻을 수 없으니 통합병원에서 화장 처리했다.
통합병원 원장은 전두환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는데,
병원 굴뚝은 난방용 보일러에 쓸 높이나
용량을 초과하는 것이었고
당시 날씨가 더워 난방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인근 민가에서 굴뚝 연기 때문에
장독 뚜껑을 못 열었다고 했다.
(희생자) 화장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허 씨는
허 씨는
"태우다 태우다 모자라서
용량이 넘치니
김해공항으로 빼가지고
해양투기를 해버렸다(고 추정된다)"며
"그 때 소각한 유골을 광주시 청소부들을 동원해
모처에 매장하고,
청소부들에게 보안 유지를 위해
급부도 저희(보안사)가 제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헬기 사격에
헬기 사격에
전투기까지 '출격 대기'…
광주시민과 전쟁한 전두환
허 씨로부터는 좀더 아찔한 정황 증언도 나왔다. 그의 발언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1980년 5월 24일로 추정된다. 그때 제가 광주 시내에서 외근을 하고 있는데 '급히 귀대하라'는 무전 연락이 왔다. (보안)사령부에 와서 대기하고 있으니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 처장이 전화를 해서 '주변에 아무도 접근시키지 말라'고 해서 단독으로 전화를 받았다. 이학봉 처장은 '쌍방교전사건(1980년 5월24일 송암동에서 공수11여단과 전투교육사 보병학교 교도대와의 오인사격으로 공수부대원 8명이 사망한 사건)'을 언급하면서 '너, 여순반란사건 알지? 이 (쌍방교전)사건이 여순사건과 유사한 거냐 아니냐?'고 했다. 내가 '제가 외근하고 들어와 파악을 못 했습니다'라고 하니 이 처장이 '긴급하게 파악해 보고하라. 믿을 놈은 너뿐이다'라고 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란 것은 당시 보안사 광주파견대에서 유일한 경상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급히 파악해 보고하겠다'고 하고, 보안과 등 담당 부서에 가서 진상을 빠르게 파악해서 (이 대령에게 보고하기를) '이건 여순반란과는 관계 없고, 오인사격으로 인한 쌍방교전 이다' 고 했더니 (이 대령이) '확실하냐?'고 3번을 물었다. 그러면서 '너만 믿는다'고 하고
'네가 광주를 살렸다'
고 했다.
그리고 옆 사람에게 (전화를 끊기 위해) 수화기를 건네주면서 들리는 소리가 '
○○에 연락해서 출격 취소시켜
'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허 씨는 "당시에는
허 씨는 "당시에는
'광주 폭격'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후에 조종사 양심선언 도 있었고 그것을 보면서 '그게 이거였구나' 하고 알았다"고 했다. 자신이 정확하게 듣지 못한 '○○'부분에 대해
"1전비(공군 제1전투비행단)
이라고 했는지 어디라고 했는지 잘 듣지 못했다"고 부연 설명도 했다.
허 씨는 전일빌딩 헬기 사격 사건에 대해서도 "27일 새벽 미명에 공수특전단에 내려온 지침이 '진압군은 한 명도 사상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고층 건물에 시민군 저격병이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그래서 헬기로 저격하는 작전을 수행했다"며 "헬기가 호버링 스탠스(정지상태로 공중에 떠 있는 것)에서 비행 계류하며 사격을 하는 것은 실시간으로 명령을 받는다. 내가 당시 진압하기 전 도청과 YWCA에 가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해서 정황을 알고 있다. 이건 헬기 비행계획서에도 나와있을 것이고, 공군과 보안사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용장 씨는 헬기 사격 사건에 대해 자신이 미군에 보고한 내용이 있다고 증언했다. 김 씨는
허 씨는 전일빌딩 헬기 사격 사건에 대해서도 "27일 새벽 미명에 공수특전단에 내려온 지침이 '진압군은 한 명도 사상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고층 건물에 시민군 저격병이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그래서 헬기로 저격하는 작전을 수행했다"며 "헬기가 호버링 스탠스(정지상태로 공중에 떠 있는 것)에서 비행 계류하며 사격을 하는 것은 실시간으로 명령을 받는다. 내가 당시 진압하기 전 도청과 YWCA에 가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해서 정황을 알고 있다. 이건 헬기 비행계획서에도 나와있을 것이고, 공군과 보안사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용장 씨는 헬기 사격 사건에 대해 자신이 미군에 보고한 내용이 있다고 증언했다. 김 씨는
"'5월 21일 낮에
UH1H 소형 헬기로
M60 '머신-거닝(gunning)했고
위치는 도청 주변'
이라고 보고했고,
27일 광주천 상류에서
위협사격을 했다'
고 보고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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