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0일 수요일

김 정은 - 트럼프의 빅딜(프레시안 : 정 욱식 칼럼 ).


미리 엿보는 트럼프·김정은의 '빅딜'
[정욱식 칼럼] 북미, 상대에 대한 요구 수준 높아질 듯
미리 엿보는 트럼프·김정은의 '빅딜'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가시권에 들어서고 있다. 이제 관심은 두 정상 사이의 '대타협(big deal)'이 성사될지 여부에 모아지고 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대타협의 양상은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북한의 핵무기와 일부 탄도미사일의 폐기 및 이에 대한 미국의 중대한 상응 조치, 즉 평화협정 체결과 대북 제재 해제, 북미 수교를 마지막 단계로 상정했었다. 이에 반해 최근 협상은 이러한 근본 조치들을 가능한 빨리하자는 쪽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해 북한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반면 미국은 조금씩 그 패를 보여주고 있다. 실무 총책을 맞고 있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통해서다. 그의 최근 발언 가운데 주목할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폼페이오의 주목할 만한 발언들

하나는 대북 안전보장과 관련해 법적 구속력을 갖춘 미국 상원의 비준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폼페이오는 5월 24일 상원 청문회에서 북한의 완전한 핵무기 및 이와 연관된 탄도미사일 폐기에 대한 상응 조치로 "미국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보장을 약속했다"며 그 유력한 방식으로 상원 비준을 언급했다.

이는 폼페이오가 평양을 다녀온 직후에 내놓은 발언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5월 13일 "북한 지도부가 미국이 실제로 이런 것을 할 것이고, 미국이 더 이상 북한 체제를 위기에 처하지 않도록 할 것이 진정으로 가능하다고 믿도록 어떠한 대통령도 하지 못했다"고 인정하면서 북한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안전 보장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1994년 제네바 합의부터 2000년 북미 공동코뮤니케 및 2005년 9.19 공동성명에 이르기까지 북한과 미국은 다양한 양자간, 다자간 합의를 했지만, 미국 의회의 비준을 거친 합의는 하나도 없었다. 이는 미국에서 정권교체가 일어나면 북미 간의 합의도 무산되는 결과로 이어지곤 했다.

폼페이오는 바로 이점을 의식해 이번 합의는 상원의 비준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는 미국이 북한에 요구해온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에 상응하는 'CVIG'(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Guarantee‧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체제 보장)를 제시함으로써 대타협을 이루겠다는 취지를 내포하고 있다.

또 하나는 폼페이오가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과 관련해 유연한 입장을 밝혔다는 점이다. 그는 상원 청문회에서 미국의 목표는 CVID라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도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에 대해서는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CVID를 요구하고 북한이 여기에 반발했던 핵심적인 사유는 평화적 핵 이용 문제에 있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조차도 금지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 프로그램이 핵무기 개발로 전용될 수 있는 길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다면, "협상의 여지"는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게 사실이라면 대타협의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북미 기본 조약?


대타협이 이뤄진다면, 그 형식과 내용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낮은 수준은 공동 발표문이지만, 김정은과 트럼프가 이 정도로 만족할 것 같지는 않다. 중간 수준은 공동 선언이다. 1972년 미중 간의 상하이 코뮤니케와 2000년 북미 공동코뮤니케와 유사한 방식이다.

가장 높은 수준은 양측의 비준을 요하는 조약, 혹은 협정이다. 이 방식은 2000년 빌 클린턴 행정부 때에도 검토되었지만, 클린턴의 방북이 무산되면서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었다. 폼페이오가 상원 비준을 언급한 만큼, 이 방식이 되살아날 가능성은 존재한다.

하지만 상원의원 3분의 2의 동의가 필요한 비준 문턱을 넘어서려면 합의 수준도 높아야 한다. CVID에 준하는 비핵화 방식과 시한뿐만 아니라 탄도미사일, 생화학무기, 인권 문제 등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야 의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요구 사항이 높아질수록 북한의 요구도 높아질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주권 존중, 불가침 확약을 비롯한 평화협정 체결, 대북 제재 해제와 북미 수교 등은 당연히 그 목록에 들어갈 것이며, "미국의 대북 핵 위협의 근원적인 해소"도 요구할 공산이 크다.

만약 김정은과 트럼프가 조약이나 협정에 서명하면, 공은 미국 의회로 넘어갈 것이다. 상원이 신속하게 비준해준다면, 대타협의 이행 속도도 빨라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가능성도 존재한다. 상원에서 비준을 늦추거나 부결된다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 형욱 - 죽음의 여행(프레시안 : 홍 춘봉 기자).


카지노에서 실종된 김형욱 전 중정부장 미스터리
 
[홍춘봉 기자의 카지노 이야기] ㊾김형욱 전 중정부장과 카지노
2018.05.30 09:59:08
카지노에서 실종된 김형욱 전 중정부장 미스터리


김형욱 회고록을 집필한 김경재 전 의원은 1977년~1979년 9월까지 미국에서 김형욱 전 중정부장을 가장 자주 접촉한 인물이다.

그런 김경재 전 의원이 김형욱 회고록 5권인 ‘혁명과 우상’에서 김형욱 실종과 살해에 대해 예리하면서도 특별한 내용을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혁명과 우상’에서 한국인 킬러를 고용한 살해수법 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김경재 전 의원이 집필한 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 ⓒ프레시안

<김형욱은 1979년 10월 1일 오전 벤윅 익스프레스를 쏜살같이 빠져나와 케네디 공항에 도착해 바로 파리행 콩코드 여객기에 탑승했다. 좌석은 2등 프레스티지석이었다.

프랑스는 5시간 비행거리지만 미국 동부보다 대여섯 시간 앞서가기 때문에 그가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 45분이었다. 이상열 공사가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부장님, 어서 오십시오.”
“잘 있었소, 이 공사”(중략)

둘은 이상열의 푸조 외교관차를 타고 리츠 호텔로 향했다.
“이 공사, 별일 없으면 카지노나 가지.”
“그러시죠”

파리의 카지노는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 6시에야 문을 닫아 4시간을 쉬다가 오전 10시에 다시 문을 열기 때문에 진짜 도박꾼들은 밤 10시경에 가는 것이 오히려 이른 편이었다. 김형욱은 여장을 풀자마자 그랑타르메가 1번지에 소재한 카지노 ‘르 그랑세르 쿨’로 달려가 바카라 도박을 하는 홀로 들어섰다.

“아이고 제너럴 김, 어서 오십시오.”
김형욱은 자신이 제너럴, 즉 ‘장군’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자주 나타나는 단골에다가 손이 커서 카지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VIP손님이었다. (중략)

김형욱이 파리 카지노에서 며칠째 도박에 빠져 있던 1979년 10월 5일 오후,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짧은 머리에 가늘게 찢어진 눈을 가진 30대 후반의 동양인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체구는 크지 않았으나 특수훈련이나 합기도를 연마한 사람처럼 날렵하고 다부졌다.

그의 이름은 조용박, 일본 이름은 구로이 다카기리, 그리고 여권 이름은 김승이었다. 곽성용이라는 동행이 있었다.

▲오충일 국가정보원 진실위원장. ⓒ프레시안

조용박은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경력을 가진 프로페셔널이었다. 일본으로 밀항하는 건 몸 풀기 정도에 불과하고 남한과 북한을 제 안집 드나들 듯 왕래하는 사나이였다. 평양에 갈 때는 북파 공작원으로 서울에 들어올 때는 남파 간첩으로 아무런 갈등 없이 칠면조처럼 색깔을 바꾸었으나 잘도 살아남는 불사조 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중략)

1979년 10월 7일 오후 7시, 김형욱은 지쳐있었다. 카지노 ‘르 그랑 세르클’에 오전 11시 무렵 도착해 점심을 적당히 먹고 꼬박 8시간을 카지노 도박에 매달렸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서 귀엣말을 했다.

“부장 각하, 정지숙(가명)씨가 오셨습니다.”
“응, 그래, 당신 누구야?”“정지숙씨를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구먼, 어디 계신가”
“아래 1층 승용차 안에 있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좋아, 나가지” (중략)

두 대의 검은 승용차가 대기해 있었다. 앞 차는 이상열 소유의 푸조 외교관차, 그리고 뒤는 검은색 캐딜락이었다. 캐딜락을 지나치는 순간 옆에서 수행하던 남자가 오른 팔을 거역할 수 없을 만큼 억센 힘으로, 그러나 목소리는 아주 은근하게 말했다.

“각하, 저희들이 이 차로 모시겠습니다.”
“아, 이 차”

당시 중정 공작원들은 중정 부장을 ‘각하’라고 불렀기에 김형욱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캐딜락 앞에 서 있던 다른 한 남자도 가세하여 뒷좌석으로 김형욱을 밀어 넣었다. 어투는 공손했으나 밀어 넣는 행동은 거칠었다. (중략)

▲김형욱 실종사건을 11년간 추적한 김형욱 죽음의 여행 표지. ⓒ프레시안

신현진은 캐딜락으로 돌아오자 차의 기어를 넣고 쏜살같이 파리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캐딜락이 인적이 없는 시골길에 들어서자 조용박은 김형욱의 목을 그의 겨드랑이 뒤로 나오도록 오른손으로 감싸 안아 목뼈를 꺽었다.
“으드득.....”
김형욱의 몸놀림이 멎었다. 캐딜락은 어둠 속으로 더욱 속력을 냈다. 이상은 조용박의 현장 설명이다. (중략)

이후 조용박은 김형욱의 시신을 닭모이를 만드는 동물사료 분쇄기인 ‘해머밀’에 집어 넣어버렸다고 주장했다.

반면 동행한 신현진은 도로에서 50미터 떨어진 장소에서 머리에 권총을 쏘아 죽이고 땅을 깊이 파지 않은 채 두껍게 쌓여 있던 낙엽으로 덮여버렸다고 주장했다. 김형욱 회고록5권 혁명과 우상에서>

진실위가 김형욱 실종사건을 발표한 뒤 3년이 지나 시사월간지 <신동아>는 한 경찰관의 인터뷰를 통해 김형욱은 국내로 비밀리에 송환돼 국내에서 살해됐다는 주장을 보도하였다. 

경찰에서 31년간 외사(外事)업무를 담당했던 한 경찰은 <신동아> 2008년 5월호 인터뷰를 통해 오충일 위원장과 완전히 상반된 주장을 하였다.

▲김재규 중정부장이 김형욱을 회유하기 위해 자필로 쓴 편지. ⓒ프레시안

<윤모(72) 전 경위는 경찰에서 31년간 외사(外事) 업무에 종사했다. 외사란 외국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대사관, 영사관 등 국내에 상주하는 외국 공관, 상사(商社) 및 단체에 대한 정보 수집, 외신 분석, 국내 거주 외국인 및 해외출입국자 동향 파악 등이 주요 임무다. 

서울대 법대 출신의 수재였던 그는 군 제대 후 1962년 순경으로 경찰에 투신했다. 1963년 4월부터 서울시경찰국(시경) 외사계(정보4계)로 옮겼고 1967년 치안국(치안본부 전신) 외사과로 옮긴 뒤 1994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한 번도 부서를 옮기지 않았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실종된 것은 10·26 직전인 1979년 10월초. 2005년 이 사건을 조사한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김형욱은 1979년 10월7일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중정의 사주를 받은 외국인 2명에 의해 살해됐다”고 밝혔다 

윤씨는 이에 대해 “국정원 진실위 발표는 소설”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에 따르면 김형욱은 1979년 10월 김포공항을 통해 국내에 들어온 직후 실종됐다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승객이 다 내린 뒤 얼마 지나서 얼굴에 검은 자루가 씌워진 사람이 따로 내렸다. 양복을 입은 두 사람이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이들은 비행기 바로 옆에 대기 중이던 검은 세단에 그 사람을 구겨 넣고 사라졌다.” 

윤씨는 이 얘기를 김포공항에 나가 있는 외사요원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했다. 그가 특이동향 보고를 하면서 “김형욱이 들어온 것 같다”고 귀띔했다는 것. 

“그날 밤 관련 내용을 정보보고서에 담아 외사관리관에게 결재를 올렸다. 보고서 밑에 ‘열람 후 즉시 파기’라고 적었다. ‘김형욱’이라고 이름을 적지는 않았다. 일주일쯤 지나 김형욱이 실종됐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날 김형욱을 태우고 김포공항에 도착한 문제의 비행기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출항한 대한항공 여객기였다고 한다. 취리히는 김씨의 예금계좌가 있었다고 알려진 곳이다. 윤씨는 “(김형욱을) 마취시킨 후 기내식 창고 같은 곳에 숨겨 데려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김재규 아니면 김형욱을 죽일 사람이 없었다. 박정희는 김형욱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박정희를 분노케 한 김형욱 회고록이 이미 일본에서 출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김형욱 회고록은 국내에서는 출판이 금지됐지만 외사계는 해외 경찰 주재관을 통해 그 책을 입수했다. 

내가 가장 먼저 봤다. 중정도 갖고 있었다. 김재규는 그때 이미 박정희 암살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박정희가 죽을 경우 그의 경쟁상대는 김형욱이었다. 중정 출신 인물 중 미국이 가장 맘에 들어 한 사람이 김형욱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회고록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 후계구도에 휘말려 살해됐다는 분석이다. 

윤씨는 김형욱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김형욱이 서울로 납치돼 온 뒤 김재규가 담당에게 ‘어떻게 됐느냐’고 확인했다. 담당요원은 ‘혼수상태에 빠진 김형욱이 탄 차를 폐차장 압축장치 속에 밀어넣었다’고 보고했다.” 신동아 2008년 5월호에서>

▲김형욱 전 중정부장이 생전에 즐겨 찾았던 미국 라스베이거스. ⓒ프레시안

김형욱의 실종설과 사망설이 언론에 최초 보도되기 시작한 1개월 여 뒤 유족인 신영순은 1979년 11월 18일 미국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고소장에는 한국의 공권력이 남편인 김형욱을 살해했다면서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이상열 주 프랑스 공사 등을 살인죄로 고발했다. 이 고소는 그해 12월 기각되고 말았다. 미국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김형욱의 실종설과 사망설이 세인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던 1984년 10월 8일 신영순과 그의 가족들은 관련 당국에 김형욱에 대한 사망신고를 하였다. 

5.16 군사 쿠데타는 미 CIA의 가장 성공적인 해외 공작 (프레시안 : 이 재봉 교수 칼럼 ).


5.16쿠데타, CIA의 '가장 성공적인' 해외 공작?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 (4)
 
2018.05.31 13:52:46
5.16쿠데타, CIA의 '가장 성공적인' 해외 공작?
5. 5.16은 중앙정보국 (CIA)의 '가장 성공적인 해외 공작'

 
앞에서 거듭 밝혔듯, 미국정부 외교문서집인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1-63, 제22권'엔 5.16 군사쿠데타를 앞두고 한 달이 넘는 기간의 기록이 통째로 빠져 있다. 쿠데타 모의 및 준비 기간이랄 수 있는 1961년 4월 12일부터 5월 15일까지의 외교문서에 대한 비밀을 전혀 해제하지 않은 것이다.

국무부 외교사 연구팀은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 국가안보위원회 등 대외정책을 다루는 부서에서 만든 기밀 외교문서에 대해 30여 년이 지나면 공개 여부를 검토한다.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취지로 공개하지만, 국익을 해칠 수 있거나 관련자의 신변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부분은 제외한다.

이 경우엔 어느 문서의 어떠한 부분에서 얼마의 분량에 대해 비밀을 해제하지 않는지 명시하는 게 보통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소개했듯, 앨런 덜레스 (Allen Dulles) 중앙정보국장이 1961년 5월 16일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낸 비밀 보고서에 괄호를 달아 "1줄 미만 삭제" 등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5.16쿠데타 직전까지 한 달이 넘는 기간의 문서 전체를 아예 공개하지 않았다. 그 무렵 한국에서 급박한 정치 상황이 전개되면 서울의 주미한국대사관과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워싱턴의 국무부와 중앙정보국 본부 앞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전문을 보내곤 했는데 34일간의 문서를 모두 비밀에서 해제하지 않은 것이다.

이야말로 미국이 5.16쿠데타에 적극적이고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얼마나 극심하게 개입했으면 쿠데타 구상이나 준비에서 발발까지 특정 문서의 특정 부분이 아니라 한 달 남짓 주고받았을 수십 통의 전문 가운데 단 한 건의 문서조차 공개하지 못하겠는가. 

1960년 4월혁명에 의해 민주적이고 합법적으로 들어선 정부를 1년 뒤 폭력적이고 불법적으로 뒤엎은 군사쿠데타를 미국이 지원하거나 주도했다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자유와 민주를 앞세우는 미국의 위선을 드러냄으로써 불러올 국익 훼손을 막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리라는 뜻이다.

한편,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중앙정보국장을 지낸 앨런 덜레스가 1964년 5월 BBC와 인터뷰하면서 자신이 중앙정보국장으로 일하면서 '가장 성공적인 해외 비밀공작'으로 5.16 쿠데타를 꼽은 것은 특이하다. 

중앙정보국이 1947년 창설된 직후부터 특히 1950년대 '해외 비밀공작 황금기'에 요인을 암살하거나 쿠데타를 부추겨 정권을 전복시킨 사례는 무수히 많지만 공개적으로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5.16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분석해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미국은 장면 정부가 전복되기를 원했다. 그 무렵 국무부와 주한미국대사관이 주고받은 전문에 따르면, 장면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미국의 충고를 잘 받아들였지만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나약한 지도력은 세계적으로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0년 전후 한국을 강력한 '반공 보루'로 만들려던 미국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미국은 늦어도 1960년 6월부터 군사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960년 11월, 중앙정보국, 국무부, 국방부 등의 정보기관들은 "군부가 민간정권을 대체하려고 시도하기 전에 한국 상황이 상당히 악화해야 하는데 지금은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보고했다. 

1961년 3월, 한국에 대한 원조업무 책임자 휴 파알리는 "뇌물과 부패와 사기"로 "병든 사회"에서 한국군부가 "미국의 치밀한 지도 아래" 정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군사쿠데타 외에는 장면 정부에 대한 대안이 없는 것 같다고 백악관에 보고했다.

셋째, 중앙정보국은 5.16쿠데타를 은밀하게 지원했고, 주한미군은 쿠데타를 진압하지 않았다. 중앙정보국 한국지부는 늦어도 1961년 4월부터 쿠데타 음모를 파악하면서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중앙정보국과 국방부는 쿠데타 주도자와 지지자들의 명단과 성향까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앨런 덜레스 중앙정보국장은 1961년 5월 5일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한국의 불안한 정황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있었는데도 쿠데타에 대한 보고를 하지 않다가, 5월 16일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때까지의 정보를 한꺼번에 보고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5월 16일 새벽 3시경 쿠데타가 시작될 때부터 자신의 직권으로 미군이든 한국군이든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었지만, 쿠데타를 진압해달라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면서 7시간이나 지난 10시 18분 미8군 공보처를 통해 모든 미군병력은 합법적인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윤보선 대통령이 반대하고 장면 총리가 숨어 버렸기 때문에 병력동원을 자제했다는 변명을 덧붙였다. 

공개적으로 쿠데타를 옹호할 수 없었기에 부린 억지였다. 매그루더 사령관의 입장에 동의하며 미국이 합법적인 한국정부를 지지한다고 밝힌 그린 대리대사의 성명도 위선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16일부터 3일간 계획으로 캐나다를 국빈방문하고 있었기에 쿠데타에 대한 중앙정보국장의 보고는 백악관 국방담당보좌관을 거쳐 캐나다로 전달되었다. 대통령이 5월 16일부터 워싱턴을 비울 계획이 오래 전부터 잡혔기 때문에 중앙정보국이 쿠데타 주도자들과 거사 날짜를 그 날로 잡았으리라는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대통령이 반대하더라도 최대한 시간을 벌어 상황을 뒤집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마침 케네디는 매그루더와 그린의 위선적 성명에도 내정간섭의 모습을 보이지 말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미국 대통령도 장면 정부의 교체를 내심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중앙정보국장이 가장 성공적인 해외 비밀공작으로 5.16쿠데타를 꼽은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개승냥이의 사법부 적폐 청산 방법(프레시안 : 이 태경 칼럼).


법원에는 양승태만 있는 게 아니다.
 
[기고] 법원의 개혁세력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법원에는 양승태만 있는 게 아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수장으로 있던 시절의 대한민국 사법부는 얼마나 망가졌던 것일까? 일명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시작된 대법원 특별조사 결과가 점입가경이다. 보도에 따르면 대법원 특조단의 3차 조사 결과의 골자는 양승태가 사법부의 수장으로 있던 시기 양승태 등의 숙원 사업이던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재판을 지렛대로 삼아 박근혜 정권과 거래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도 발견됐다 한다.(☞ 관련기사 : 법에 짓밟힌 KTX 승무원들 이야기)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이 직접 작성한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 추진을 위한 청와대(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이라는 문건에는 '국가적, 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건 등에 BH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 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우선, 그동안 사법부가 VIP(박근혜 대통령)와 BH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권한과 재량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해온 사례를 상세히 설명' 등이 서술돼 있다. 이는 '법치주의의 수호자'이자 '인권의 보루'역할을 해야 할 헌법적 의무를 지닌 법원이 그 의무를 송두리째 내던친 채 정권과 야합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 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에는 '우선, 그동안 사법부가 VIP(박근혜 대통령)와 BH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권한과 재량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해온 사례'들이 아래와 같이 자랑스럽게(?)열거됐다. 

①합리적 범위 내에서의 과거사 정립(국가배상 제한 등) ②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사회적 안정을 고려한 판결(이석기, 원세훈, 김기종 사건 등) ③국가경제발전을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둔 판결(통상임금, 국공립대학 기성회비 반환, 키코 사건 등) ④노동개혁에 기여할 수 있는 판결(KTX 승무원, 정리해고, 철도노조 파업 사건 등) ⑤교육 개혁에 초석이 될 수 있는 판결(전교조 시국선언 사건 등)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VIP와 BH에 힘을 보태 옴 

양승태 대법원은 단지 '사법권의 독립'이나 '공정하게 재판받을 국민의 권리'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파괴한 것이 아니다. 양승태 대법원은 수 많은 재판을 통해 무수히 많은 시민들의 생명과 존엄과 평안과 재산을 위협하고, 능멸하고, 해쳤다. 양승태 대법원은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유일한 주권자인 국민의 존엄을 짓밟았다. 양승태 대법원은 사법부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잘못을 저지른 것인데, 오직 박정희 유신 시절에 자행됐던 인혁당 사법살인 정도가 양승태 대법원의 잘못에 비견 될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사법부 내에 양승태와 양승태 체제에 복무한 부역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양승태 대법원 시절에 자행된 재판거래 등 '사법행정권 남용'사건에 대해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사죄한 전국법관대표회의 의장 최기상 부장판사 같은 경우 양승태 등의 법비(法匪)들이 자행한 사법권 독립 유린 사건의 심각성을 정확히 직시하고, 사법부의 존재근거와 이유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관대표회의 의장 사과... "사법부 스스로 존재 근거 붕괴")

최 부장판사가 30일 법원 내부전산망에 게시한 '사법행정권 남용에 관해 드리는 말씀'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더욱이 위 사건들은 재판을 받은 당사자의 삶을 비극으로 바꾸어 놓기도 하였습니다. 언론에 따르면 KTX 승무원 사건의 원고 중 한 분은 패소 판결을 받은 후 절망감과 빚 부담으로 힘들어하다가 직접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때 3살이던 고인의 딸은 이제 6살이 되었고,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엄마를 찾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누가 고인의 극단적인 선택과 어린 딸의 엄마 없는 삶을 보상할 수 있을까요."라는 대목이다. 양승태 대법원에 의해 공정하게 재판받을 권리가 침해당한 나머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법 피해자와 그 피해자의 딸을 향한 최 부장판사의 시선은 절절하고 애틋하다. 양승태 등 법비들이 주권자인 국민을 내려다보던 시선과는 사뭇 다르다. 전국법관대표회의와 전국법관대표회의의 의장인 최기상 부장판사의 향후 행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또한 상고법원 신설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양승태 대법원으로부터 사찰을 당한 차성안 판사 같은 이도 눈에 띈다. 차 판사는 양승태에 대해 형사고발을 할 것을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천명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뒷조사 당한 현직 판사 “양승태 대법원 형사고발” 공개 선언···전국 확산 주목)

지금 대한민국의 주권자들이 해야 할 일은 김명수 대법원을 강하게 감시하고 압박해 양승태 등이 저지른 범죄행위가 낱낱이 드러나고 양승태 등이 그에 상응하는 형사처벌을 받게 하는 것과 함께 법원 내에 존재하는 개혁세력들에게 힘을 실어주어 사법을 국민의 사법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칫 사법 전체를 적으로 간주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선 곤란하다.